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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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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고

/경양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태고(太古) 이고 호는 경양재(景陽齋)이며 본관은 밀성(密城)이고 모효재 박지현(慕孝齋 朴之賢) 선생의 아들로서 24세의 나이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우암 선생이 돌아가신후 향리에 돌아왔다.

선생은 스스로 도방문(圖榜文)을 지어 군수에게 재목(材木)을 청하여 그 재목으로 자양산하(紫陽山下)에 경양재(景陽齋)를 창건하여 은거 강학하여 후진들을 양성 하였는데 선생은 그 때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선생은 숙종조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때에 사계 김장생(司溪 金長生) 선생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반대하는 상소(上소)를 하여 조정을 현혹케 하므로 선생은 제종형제인 상고(尙古), 사고(師古)와 모든 영중유생(嶺中儒生)들과 더불어 변무소(卞誣소)를 지어 상소하고 또 재소하여 결국 비답(批答)이 내려 문묘에 종향(從享)케한 공로가 컸다.

1702년(숙종 28년)에 왕명으로 문학재덕(文學才德)이 높은 선비를 천거할 때 일휴재 이숙(逸休齋 李숙)이 감사로 있으면서 선생을 천거하여 준원전 참봉(濬源殿 參奉)에 오르고 이듬해 장녕전 참봉(長寧殿 參奉)을 지냈다. 선생은 한포재 이건명(寒圃齋 李建命), 단암 민진원(丹岩 閔鎭遠), 소재 이이명(疏齋 李 命)등 선생들과 교의가 두터웠으며 증시(贈詩)와 서사(書辭) 왕래가 많았는데 지금도 그 친필 등이 보존되어 있다. 선생이 향년 49로 졸하니 여러 벗들이 애통하고 애석하며 만사(挽辭)를 지었는데 한포재(寒圃齋) 선생의 만시(挽時)에 말하기를 <북궐천은이 중하고 남주에 오도상(吾道상)이라 이윤이 능가업하니 월명고자양> 이라 하였으니 선생은 희대의 유학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집이 있고 지산서원에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 청도문헌고, 도주지, 도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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