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도청 홈페이지

  1. Home
  2. 경북을 빛낸 인물>경북의 역사>경북소개>경북소개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박종석

태백/만취당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607년(선조 정미년)
시대

상세설명

여섯 살부터 효도를 한 박종석(朴宗碩) 선생은 월성 박씨요 자는 태백(太白)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라고 불렀다. 효자로 이름 높은 박민수(朴敏樹)의 현손(玄孫)이며 아버지 여재(汝梓)께서 18세에 돌아가시고 만취당은 1607년(선조 정미년)에 유복자로 태어나서 어머니 도씨(都氏)의 엄한 가정교육 아래서 자라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다른 아이와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세 살에 심한 설사를 만나 여러 달 동안 계속하였으나 한번도 옷을 더럽힌 적이 없어 집안 사람들이 비상한 인물이 될 징조라고 하였다.

육칠 세에 이미 애친(愛親)의 도리를 알아 늘 부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달래고 위로하기 바빴다. 혹 밖에 나갔다가 과실 한 개라도 얻으면 먹지 않고 꼭 집에 가져와서 어머니에게 드리고 어머니가 먼저 맛보신 후에야 먹었다고 한다. 이웃에 잔치나 제사가 있으면 어머니는 못 가시게 하고 혼자 참여하여 얻은 음식물은 먹지 않고 가지고 돌아와서 어머니께 드렸다.
"모자(母子)가 같이 가면 어떠냐?" 하시면
"가난한 사람이 그런 곳에 가면 음식을 찾아다닌다고 남이 천(賤) 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시었고 어머니가
"내가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무방하나 네가 천시(賤視)를 당하는 것을 내가 어찌 참겠느냐?"하시면
"자식이 어버이를 위한 일인데 누가 멸시를 하겠습니까?"하면서 어른보다 더 소견(所見)이 있는 말을 하더라고 한다.

10여세 때에는 글을 배우는 다른 아이 보다도 뛰어나서 글 사장(師丈)의 칭찬을 받았고 그 서당(書堂)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어 인근의 선비들을 찾아다니며 스승과 제자의 예(禮)를 갖추어 학문의 깊은 뜻을 배웠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남들처럼 아버지를 모셔보지 못한 애통함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6년이 지난 해 못뵈온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파 아버지의 묘소 옆에 띠 집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여곡을 하면서 상식(上食)하였다. 동네 여러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나 한 번 먹은 마음은 여름도 겨울도 없었다.

하루는 큰 범이 나타나 시퍼런 불을 켜서 다가왔다. 선생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 나는 아버지를 모시지 못해 천추의 한이 되어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 너는 영물(靈物)이라고 하는데 나를 해칠 것이냐?"
라고 타이르니 범이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낮춰 절하는 듯 하더니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이 있은 후는 3년이 다 지날 때까지 아무 짐승도 나타나지를 안 했다고 한다.

원근(遠近)에서 이 소식을 듣고 위문 오는 사람이 많았으며 특히 현감 백효민(白孝民)이 찾아와서 위로를 하면서 "거처가 허술하여 건강이 걱정되니 수리를 해 주겠다. "고 하였으나 선생은 "관(官)의 힘과 재물을 빌림은 내 분수에 어긋나는 일이다."하고 극구 사양하였다. 그 후 현감이 그를 벼슬에 천거하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상복을 입고 관아에 나아가 "어버이를 섬기지 못한 죄인이 어찌 벼슬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사양하였다.

22세 때 홀로 계신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니 애통함을 금치 못하여 주야로 호곡하다가 졸도까지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모든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또한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과거를 보아 벼슬길로 나아가기를 권하였으나 탄식하면서 "대개 과거를 보아 녹(祿)을 구(求)함은 어버이를 위함인데 지금 나에게는 양친이 모두 안 계시는데 누구를 위해 명리(名利)를 구하겠느냐?"하시고 오로지 몸과 마음을 닦는 학문에만 힘을 써서 여러 경전을 암송하였고 글을 쓰면 그 문장이 이치(理致)에 한치도 어긋남이 없어 모두가 우러러보았다.

1660년(현종 경자년)에 54세의 한창나이로 돌아가시니 원근의 인사들이 모두가 애석하게 여기셨다. 계자감(戒子 ) 백물감(百物 )등을 지어 후세 젊은이들을 훈계하였고 대학황극론(大學皇極論)을 저술하시어 평생의 생활 신조로 삼으셨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