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재화(在華)이고 자는 국원(國元)이며 호는 행오(杏塢)로 본관은 밀성이다. 제우당 박경전(悌友堂 朴慶傳)선생의 후예로 청도 행정(杏亭)에서 1859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을 즐겨 수학하여 1896년(고종 33년)에 숭덕전 참봉에 오르고 1900년(고종 37년)에 충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거쳐 1901년(고종 38년)에 황해도 장련(長連)군수, 경상도 웅천(熊川)군수를 역임하고 1902년(고종 39년)에는 창녕군수가 되어 많은 치적을 올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특히 옹천 창녕군수로 있을 때 민소(民訴)를 공정히 처리하였으며 창녕군 각씨족(各氏族) 2백명의 유림선비들로 향약계(鄕約契)를 조직하여 도의를 전직했으며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지성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1903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버리고 부친을 봉양하고 성묘를 지성으로 하고 있던 중 경주부윤의 발령이 있었으나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나아가지 않았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하여 의거코저 하였으나 노부(老父) 시하에 독신으로 한탄만 하다 병을 얻어 1916년에 졸하니 향년이 59였다. 조병희(趙秉희), 민연하(閔연夏), 이규락(李圭洛), 최현달(崔鉉達), 박병숙(朴炳淑),박병익(朴炳翊)등과 교우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