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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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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룡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공의 본관은 충주이고 성건의 둘째 아들로 황간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에 김산에서 의병대장으로서 많은 전적을 남겼다.
일찍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이 때 군복에 관한 비위사건에 연좌되었다가 임진란을 맞아 누명을 씻을 때가 왔다 하고 그 길고 고향인 황간에 내려와 친척과 동리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니 500명의 군대가 이루어졌다.

1592년 8월에 군사를 이끌고 특히 횡포가 심한 왜적을 만난 박대장은, 영동 의병대장 한명윤, 상주목사 김해, 훈련 정기룡 등의 군대의 도움을 받아 세 번이나 공방전을 편 끝에 적을 물리쳤다. 임진 10월 초에는 지례 전투에 참가하여 1,500의 적을 창고에 가둔 채 불살라 적을 몰살시켰다.

적이 점령하고 있는 성주성을 공략할 때에는 곽재우 김면 정인홍 김시민 등 의병군과 연합전을 폈는데 박이룡 대장은 북문을 지키고 있었다. 제2차 성주성 공략작전에도 참가하여 적병 20여를 베고, 겨울에 접어들어서는 개령의 적이 방하재(대향면)을 넘어 공자동으로 침입하려는 적과 싸워 이를 막았다.

한편 우두령 싸움에도 참가하여 적의 거창 침입을 박는데 공을 세우고, 이 밖에 하로에 진을 친 이래 그곳을 본거지로 개령 지례 선산 성주 등지에서 박이룡 대장이 겪은 작고 큰 싸움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593년 1월에 박대장이 처음으로 왜적과 싸웠던 부상고개에서 또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싸움에서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적군에게 잡힐 찰나 한명윤 대장과 강절 대장의 내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하로 본진으로 돌아와 치료했다.

박이룡 의병대장은 원래 의리가 있고 책임감이 강했는데, 지난 날 해서 수령으로 있을 때 본의 아니게 일어난 일에 대해 뼈아프게 불충을 느껴온 지라 임진란을 당해서 속죄의 기회를 얻어 나라에 몸바칠 때는 이때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싸움에 임해서는 언제나 진두지휘로 죽음을 각오했다. 병석에서 일어나자 1593년에는 전공으로 능성 현령으로 재임명되었다가 싸움에서 얻은 상처가 다시 도져 재임중에 죽었다. 묘는 봉산면 직지사역 옆에 있고 신도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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