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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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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붕

활동시기
미상

상세설명

선생의 행적에 대한 자료가 없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록된 사실을 적어본다. 선생은 할말의 풍운이 회오리칠 때 활약한 풍운아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격동기의 한 모퉁이를 장식한 인물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선생의 후곤들이 청도읍 원정동을 중심하여 분포 세거하고 있다.

매천야록 첫장에 기록되기를 '청도(淸道)에 사는 박유붕(朴有鵬)이란 사람은 관상을 잘 보았는데 자기의 용모를 보고 한 쪽 눈이 애꾸가 되어야 귀하게 된다고 하여 드디어 한 쪽 눈을 찔렀다. 어렸을 때 고종(高宗)을 뵙고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게 하고 말하되 "이분은 왕이 되실 분이니 이러한 말을 누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고 당부하였다. 그는 갑자년(고종 원년) 후에 관직이 남양부사(南陽府使)에서 수사에 까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또 기록하기를.....
'궁인 이씨(宮人 李氏)가 완화군(完和君)을 출산하자 계씨(季氏)로 사성(賜姓)했다. 이 때 고종은 나이 17세로서 매우 기뻐하였으며 완화군을 원자(元子)로 삼으랴고 하였으나 대원군은 중궁(中宮)에게서 경사가 있으면 어찌하려 하느냐고 반대하면서 조급히 서두르지 말 것을 간(諫)하였다. 고종은 관상가 박유붕을 불러 물었지만 그는 생각에 잠겨 무뭇거리다가 조금 늦추라고 한 것이 아니가 하고 의심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박유붕(朴有鵬)은 사망했다. 구례(求禮) 사람 유제관(柳濟官)이란 사람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서울에 살면서 박유붕과 내왕을 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하루는 박유붕의 집을 방문하니 그는 뒹굴면서 죽으려하며 구구(九구:사람 몸의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놀라서 물어니 팔을 저으면서 응답하지 못하다가 잠시후 죽었다. 어떤 이는 사약(賜藥)을 내려죽게 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고 유제관(柳濟官)이 나에게 말하였다.'

선생의 죽음에 대하여 구구한 말들이 많으나 그 진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아들인 부사 박풍혁(朴 赫)선생이 천리길을 운상하여 지성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한다.

(참고문헌: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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