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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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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朴英)

숭당(松堂)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밀양
출생시기
1417년
출생지
1417년
시대
조선시대

상세설명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의주 목사 경상좌도병사 병조참판겸 중추 부사에 이르렀으나 항시 말하기를 "말을 달리고 칼을 쓰는 것은 한 남자의 용맹에 불과하니 사람이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어찌 군자라 하리오?"하더니 연산이 손수 그 아버지(성종)가 기르시던 사슴에 활 쏘는 것을 보고 장차 이 나라가 어지럽겠구나 하고 탄식하며 벼슬을 버리고 선조의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와 정붕 선생께 대학(大學) 강의를 받고 비봉산 아래 미봉사라는 절에서 오랜 세월 문을 굳게 닫고 공부에만 열중하니, 대학을 읽은 횟수가 점차 늘어 대학의 참뜻인 "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참뜻을 깨닫는다는 뜻)를 알 무렵 신당 선생이 찾아 왔다.

신당 선생은 "그동안 만 번을 읽었지?" 모래면 끝날 듯 합니다" 지난 가을, 내가 저 냉산(冷山)을 가르키며 저 산 바깥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자네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지 않았는가? 인제 그 만큼 공부를 하였으니 짐작이 있을 것이니 다시 한번 대답해 보게. 저 산 밖에는 무엇이 있겠나?"하고 신당 선생이 물었다. "산 밖엔 다시 산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송당이 대답하니 신당 선생이 크게 칭찬하고 손을 잡으며, 자네 글 읽은 공을 알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냉산문답'이다. 또, 이어서 "이제 어떤 공부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선생은 의학을 공부해야 하겠다고 했다. 시골에는 훌륭한 의원이 없으므로 귀중한 생명을 잃게 되는 사람이 많으며, 의원이 있다 해도 이름있는 양반 집에만 드나들게 되고 가난한 백성은 부모에게 약 한 첩을 못쓰고 생죽음을 당하게 되어,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는 뜻을 말씀드리자, 신당선생은 선생의 높은 뜻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성리학과 의서를 공부하여 불쌍한 생명을 구한자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며,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높은 덕을 기리어 "대학동자"라 부르고 있다. 70세로 일생을 마치니 나라에서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문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금오서원에 향사하고 있으며, 선생이 공부하던 곳에 송당(松堂-선산읍 신기리 낙동강변)이란 정자와 미수 허목(眉수 許穆)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참고문헌 : 선산군지, 금삼의피, 신도비문, 조선명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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