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양무(揚茂)이오. 호는 두촌(杜村)이며 본관은 밀성(密城)이고 고려 문신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 密直副使)를 지낸 박양언(朴良彦) 선생의 7세손으로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과 더불어 친히 사귀고 학문을 강론(講論) 하였다.
선생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무랑(宣務郞)에 오르고 이어 김천독우(金泉督郵:김천도 찰방)에 올라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쇠진(衰盡)되어 김을 개탄하여 양호당 우현보(養浩堂 禹玄寶)선생과 더불어 그 직을 떠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대대로 받은 국은을 무엇으로 신하의 도리를 다 할수 있겠느나> 라고 하였으며 이성계(李成桂)가 정권을 잡고 이씨 조선(李氏 朝鮮)이 건국되자 퇴거하여 만수산(萬壽山)에 은거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말 하기를 <나라를 위하려하니 사직(社稷)의 보존이 어렵고 가문을 바로 잡으려니 선대가 없어지는 것울 어찌 참으리오> 라 하며 국운을 개탄하다 끝내 향리에 돌아와 문장과 시로 마음을 달래고 후학들을 훈도하여 사림의 추중을 받았고 선죽(善竹) 72현이라 하였다. 뒤에 숭절사(崇節祠)에 향사 하였다.
(참고문헌: 도주지, 도주문화, 청도문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