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도청 홈페이지

  1. Home
  2. 경북을 빛낸 인물>경북의 역사>경북소개>경북소개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박몽설부부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공은 밀양 박씨로 대덕 출신의 충신이다. 효용(사납고 용맹함)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장수감이라 남이 부러워 할 정도였다. 일찍이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었던 중봉 조현 선생은 공을 처음 만나자 '대기로다!'하고 더욱 귀하게 여기는 바가 되었다.

공은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당시는 황간 현감으로 재직했다. 왜적이 물밀 듯이 쳐들어오자
"나라에 녹값(봉급을 받은 값)을 하게 되었다!"
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죽기를 맹세하고 적을 맞아 싸웠으나 많은 적을 맞아 그만 사로잡힌 바가 되었다. 자결을 생각했으나 그렇게 죽는 것은 가치 없는 죽음임을 알았지만 적이 강요하는 항복을 참는 일도 죽음만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 욕스러움은 꼭 갚아질 것이다!'
이를 갈며 탈출을 꾀하던 공은 밤을 타 황간 냉천에 몸을 던져 수중으로 영동 심천까지를 헤엄쳐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영동의 현감은 한명윤이었다.
두 현감은 의기가 서로 맞아 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향해 전진해 갔다. 그러나, 적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거세어 천하의 용사도 어찌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용전분투 한 명의 왜적이라도 더 무찌르려던 공은 황현감 및 40여명의 용사들과 같이 진주성 촉석루 아래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아마 이때는 1592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편집자 주) 공의 부부의 정려기를 쓴 송병선은, '공의 임전무퇴한 충절은 가히 고경명·김천일에 비해 무엇이 모자라랴!'
고 찬양하듯이 초인적인 힘을 내어 물길 수십리를 헤엄쳐 갔음도 다 적을 몰아내자는 일념에서였으니 향토가 낳은 위대한 충신이라 해서 조금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공의 부인 유씨도 남편의 장렬한 최후 소식을 듣자,
"죽어서라도 하늘같은 남편을 섬기기라!"
하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니 충신과 열녀가 한 집안에서 났던 것이다.
이런 혁혁한 공의 충성과 열녀가 한 집안에서 났던 것이다.
이런 혁혁한 공의 충성과 부인도 정절도 늦게 나라에 알려져서 1882(고종 19)년에야 부부를 함께 정려를 내려며,
"충신열녀지문"이라 극찬했다.
처음은 대덕 다화촌 앞에 정려문을 세웠다가 뒤에 후손이 중산리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