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도청 홈페이지

  1. Home
  2. 경북을 빛낸 인물>경북의 역사>경북소개>경북소개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박능일

무호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57년(철종 9년)
시대

상세설명

박능일(朴能一)은 월성 박씨이며 호(號)를 남길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다는 뜻으로 무호(无號 : 无는 無의 古字이다.)라고 하였다. 1857년(철종 9년) 2월 29일 우보면 나호동에서 임란공신(壬亂功臣)이었던 박종남(朴從男)의 후예(後裔)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영민(英敏)하고 비범(非凡)하여 불의(不義)를 참지 못하는 기개(氣槪)가 있었다.

자라면서 학업에 성실하여 석학(碩學)에 이르렀고 향리(鄕里)에서 서당을 차려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있던 중 1910년 일본이 한일합방이라는 명목아래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고 갖가지 탄압을 자행(恣行)하였다. 국가민족의 비운(悲運)이 날로 심각하여 근심과 의분을 참을 길이 없었으나 한낱 초라한 선비로서 기울어져 가는 대세(大勢)를 막을 길이 없음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워 일제(日帝)에 항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죽음을 택할 곳을 어디로 할 것인가 생각한 끝에 그 옛날 그의 조상인 신라가 월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 때 그 많은 왜구(倭寇)에 시달리며 지키던 동해바다로 결정하고 1917년 7월 20일 영일(迎日) 앞 바닷가의 큰 바위에 큰 글씨로 원수의 나라를 섬기며 살기 보다는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벼슬하지 않고 파묻혀 지내온 조선의 선비 박능일 (여기사안이생與其事雁而生 불약도해이사不若蹈海而死 조선선일민박능일朝鮮鮮逸民朴能一)라고 열 아홉 자를 써놓고 바다에 투신하였다. 며칠 후 그의 시체가 물결에 따라 바닷가에로 밀려 왔었는데 곧게 정좌(正座)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원한을 품었길래 강철같이 굳고 대쪽같이 곧은 정신으로 죽음의 자세도 흐트리지 안했는가를 생각하니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일본 경찰은 이 사실을 알고 세상에 여론(與論)이 퍼질까봐 두려워 극비(極秘)에 붙여 버렸으므로 그 당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광복 후 도내(道內)의 뜻있는 사림(士林)이 그의 애국심을 길이 찬양하기 위해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워 그의 영혼을 위안했다 한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