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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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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유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충숙왕 때의 문신으로 휘는 종유(宗유)이요 시호는 충순(忠順)이며 본관은 여흥이고 민증도(閔증道)선생의 8세손이며 평장사(平章事) 민영모(閔令謨)선생의 현손으로 1245년(고종 32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나이 11세 때 왕자 시양부(始陽府)의 학우가 되어 학문에 전념하여 1263년(원종 4년)에 청도감무(淸道監務)가 되었는데 임지에 떠나기 전에 모두가 이르기를 청도 고을은 대성들이 많이 살고 있어 매우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부임한 후 군민을 다스리기를 모든 청탁을 받지 않고 오로지 법으로서 다스리므로써 그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에 오르고 충렬왕(忠烈王)때에 삼사우윤(三司右尹)을 지내고 밀직부사(密直副使),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러 물러났다. 다시 기용되어 전법판서(典法判書),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09년(충선왕 1년)중대광 첨의찬성사(重大匡 僉議贊成事),판선부사(判選部事)러 치사하고 1319년(충숙왕 6년)에 복흥군(福興君)에 봉해졌다.1321년(충숙왕 8년)에 왕족이 아니면서 군에 봉해진 사람의 봉작을 거둘 때 작을 내놓고 다시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22년(충숙왕 9년)에 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돌아오지 않으니 간신 권한공(權漢功)등이 왕을 원망하여 원나라 중서성(中書省) 심왕을 왕으로 추대를 건의 할려고 백관들의 서명을 강요할 때 여러 신하들은 그 권세를 두려워하여 그에 따랐으나 선생은 이를 꾸짖고 단호히 거절하여 응하지 않았다 한다. 또한 선생은 전고에도 밝아서 여러 사람들이 대소사간에 가르침을 받으려 왔다 한다.

선생은 1324년(충숙왕11년)에 향년 80으로 졸 하니 충순(忠順)이라 시호 하였다.
여흥 민씨(驪興 閔氏)가 우리 청도에 들어와 세거하게 된 유래는 1630년(인조 8년) 8월에 청도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민의(閔義)선생은 휘가 의(義) 또는 여찬(汝纘)이라 하고 자는 선계(善繼)이며 본관은 여흥으로 시조 민징도(閔징道)선생의 16세손이며 충순공 민종유(閔宗유)선생의 8세손이다.

선생은 1630년(인조 8년) 8월에 7대조인 충순공 민종유(閔宗유)선생이 올바르게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긴 청도에 군수로 도임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고 1634년(인조11년)에 병을 얻어 수령의 자리를 물러났으나 끝내 청도 땅에서 졸 하였다.

자손들이 청도 땅에 묘소를 모시고 그때부터 후손들이 청도에서 세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흥 민씨(驪興 閔氏)가 청도에서 세거한지 15대 약 4백여년 동안이 되며 처음 청도에 정착한 곳은 화양읍 백곡동 이였는데 그후 청도읍 원정동 능곡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후손들은 청도,밀양,김해 등지에 약 3백호 가량이 살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인의 족보,인명대사전,도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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