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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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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랑과효랑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효녀 문랑과 효랑은 충의위공 수하의 딸들로 경북 감천면 도평리에서 태어났다. 언니 문랑이 6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으나 친어머니 못잖게 지성을 다해 모셨으며 아흔 살에 드신 할머니께 대한 효성은 지극하여 인근에선 널리 효녀로 손꼽혔다고 한다. 게다가 영민하고 비범한 식견은 어른도 못 미칠 정도여서 아버지는 딸들이지만 손수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비록 딸 들만을 둔 집안이지만 화애롭게 지내는데, 박경여란 부호요 세세 권세가인 사람이 죽산 박씨 선사에 자기 할아버지 묘를 이장한 뒤 비석까지 세우는 등 뻔뻔스런 짓을 보란 듯이 강행했다. 분격한 박수하공은 감사와 성주 목사에게 진정을 내어 바로잡아 줄 것을 호소했으나 박경여와 친척관계에 있는지라 박경여를 감싸고 해를 넘기면서 박수하공을 음양으로 위협까지 했다.

박수하공은, 드디어 격쟁(징이나 꽹과리를 울려 억울함을 직접 임금께 호소하던 일)을 해서라도 이 억울함을 풀 생각으로 상경한 박수하공은 격쟁하여 호소할 기회를 얻었으나 감사는 조사를 지연시키고, 박경여는 비석을 세우더니 이제는 선산의 소나무까지 벌목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울분이 치솟은 박수하공이 벌목하는 박경여의 종을 몇 차례 때린 일로 트집을 잡아 관을 모욕했다 하여 중죄로 다스려 태장(매)을 맞아 운명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안 문랑은 밤낮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문랑은 박경여 조부의 묘를 손으로 파헤치어관을 내어 불사르고 말았다. 자기 할아버지의 관이 다 타 버렸는데도 나타나지 않던 중 관을 태운 8일째 박경여가 창검을 갖춘 군졸 백여 명을 거느리고 선산에 나타나 문랑을 쓰러뜨렸다. 이 날이 바로 1712(숙종 38년)년 음력 5월 5일 단오였고 문랑의 나이 19세였다. 이 사실은 5,6일이 지나서야 관청에 알려져 검시관이 나왔으나 박경여의 위세에 눌려 빨리 상부에 보고되지도 않았다

효랑은 늙으신 할머니와 계모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상경했다. 서울에 도착한 효랑은 남복으로 변장으로 하고 대궐에 나가 쟁을 울렸다. 그러나 여자라는 것일 발각되어 즉시 하옥되고 얼마 뒤에 특별한 배려로 방면은 되었지만 효랑은 앞이 막막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형조를 울린 원정소가 임금(숙종)에게 보고되어 어사를 내리라는 어명이 있어 안무사가 직접 사실 조사를 나온 것이다. "타살되었다는 증거를 무엇으로 삼을 것이냐?" 이때 여종 설례가 안무사 앞에 나아가, 재검을 요구했다. 이에 안무사는 이 검시를 위해 박효랑의 집에 당도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간 옷은 상해서 몸에 들어 붙었으나 살갗은 조금도 상해 있지 않았다.

왼쪽 옆구리의 상처 깊이를 3촌 5푼으로 확인했으며 매맞은 자리는 소주로 씻어서 세 군데 다 확인했을 뿐 아니라 영취(악취)조차 없었다. 그러나, 사건 해결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극악한 박경여의 농간에 임금에게 사실이 전해지질 않은 것이었다. 효랑은 세 번째의 상소를 올렸으나 해결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전말은 경향 각지에 퍼지기 시작했다. 다시 어사를 파견하란 어명이 내렸다. 재차의 어사에 의해 박경여의 죄상은 만천하에 공개, 의법처리 되었고 10년 뒤인 1724년(경종 4년) 윤 4월에 문랑에게는 정려, 효랑에게는 복호 80결을 내렸다. 문랑의 정려문을 세울 때 관에서 보조하라는 간곡한 경종의 하명까지 있었다.

효랑은 뒤에 경남 합천군 가리면 고품리 남평 문씨 동도의 아들 우징에게 출가하여 불행하게 25세에 요절하였다. 효랑의 정려도 시가 쪽 유생들의 상소로 내려졌으며 영조는 이 두 자매에 문랑·효랑이란 시명과 함께 어제 정려명까지 내렸다. 만고 효녀 자매의 정려는 처음 이곳 도고리에 세웠으나 1916년 효랑의 시가인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두 자매가 태어난 이곳에서 1978년 2월 4일에 경상북도 유도회와 종친에서 문헌공의 사당 청현사 앞에 문랑의 정비를 옮기고(효랑의 정비는 없어짐) 다시 종으로 우측에 만고효녀 죽산박씨 가운데 증시 문랑 효랑 지비라 비를 세우고 시각을 세워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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