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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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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일신/삼우당
활동시기
고려시대
본관
출생시기
1331년(고려 충혜왕 원년)
시대

상세설명

문익점 선생의 초휘는 익첨(益瞻), 이오 자는 일신(日新)이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고 본관은 남평으로 충정공 문숙선(忠貞公 文叔宣)선생의 아들로서 가정 이곡(稼亭 李穀)선생의 문인이다. 선생은 1331년(고려 충혜왕 원년)에 태어나 1360년(고려 공민왕 9년)에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직강(直講),박사(博士)를 거쳐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官)이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후 귀국하면서 목화(木花)씨를 붓통(붓筒)에 넣어 가져와 장인인 정천익(鄭天익)과함께 고향에서 이를 재배하여 우리 나라 의료(衣料) 및 경제상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375년(고려 우왕 1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문관 제학((右文館 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고 전제개혁(田制改革)에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 이림(李琳) 등의 편을 들어 병을 핑계로 서명하지 않으므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낙향(樂鄕)하여 삼우(三憂) 왕국의 부진, 성학(星學)의 부전(不傳) 기도(己道)의 불립(不立)의 뜻을 품고 은거하였다.

선생은 효행 또한 지극하여 시묘사리를 하는데 때마침 왜구(倭寇)들이 쳐들어 왔으나 흉악한 왜구들도 선생의 효행에 크게 감탄하여 물해효자(勿害孝子)라하고 범하지 않았다 하며 왕의 특명에 의해 효자비(孝子碑)가 세워지고 선생이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 명명(命名)하였다.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았다. 이조 태종(太宗)때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지고 부조묘(不 廟)를 세웠으며 1440년(세종 22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부민후(富民候)에 추봉 되었다. 남평(南平)의 장연서원(長煙書院),산청(山淸)의 도천서원(道川書院)에 향사하고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선생이 청도 군수였던 문헌이나 고증이 우리고장에는 남아 있지 않으나 청도 군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니 청도(淸道)라는 지명(地名)이 여러 곳 있다 하여도 재임중(在任中)에 전라도나 함경도에 있던 군수(郡守)가 밀양 영남루에서 시를 읊을 기회는 없을 것이고 우리고장 청도이며 당시 밀양부에 속해 있었으니 내왕하였을 것이니 분명히 우리고장 청도 군수였던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이라 믿어진다. 또한 우리고장 화양읍 범곡동의 삼태봉(청도초등학교 앞에서 송북동 입구에 걸처 세곳의 조산(造山)을 말하는데 제일 남쪽에 있는 조산 바로 앞에 요도(蓼島)라고 하여 논 한 구석을 섬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이곳은 어느 때인지 알수 없으나 어떤 사람이 유배(流配)되어 적거(謫居)하였으므로 섬이라 불리우고 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선생이 유배되어 청도 군수를 하였다면 이곳을 유배장소로 정하고 청도군수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나 확실치는 않다. 선생은 1년 후에 유배된 죄는 사면되고 계속 청도군수로 있었으나 1376년(고려 우왕 2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나고 1400년(정종 2년)에 졸하니 향년이 70이었다.

참고문헌 : 한국인의 족보, 인명대사전, 삼우당 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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