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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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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방선

자계/태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서산
출생시기
1387년(고려 우왕 13년)
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자는 자계(子繼) 본관(本貫)은 서산(瑞山)이다.
초관은 문화(文化)이었으나 중세에 서령군 성간(瑞寧君成澗)이 사본(賜本)을 받아 서령인(瑞寧人)(서령은 서산의 고호)이 되었다. 1387년(고려 우왕 13년 무진)에 송도 방제에서 서령 부원군 기(沂)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천여문구를 외우고, 쓰고 하였고, 12세 때(1399년)에 관산의 양통사에 가서 글짓기 모임에서 글제만 보면 정신과 생각이 샘물 솟듯하여 가끔 사람들이 놀랄만한 명작이 뛰어나 보는 이들이 신통이라 불렀다.

1404년( 태종 4년 갑신)에 양촌 권 근(陽村 權近)선생의 문전에 나아가 배움을 청하고 시를 지어 뜻하는 바가 도학을 닦는데 있음을 나타냈다. 이 때가 선생의 나이 17세 였는데 학문을 닦고 도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므로 당시의 석학들을 두루 찾아서 춘정 변 계량(春亭 卞季良)선생에게도 사사(師事)하였다.

다음 해 봄에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관에 들어가니 더욱 명성을 떨치었다.
1409년(태종 기축)년 당시 조정에서 세자를 패하는 것은 옳지 못함을 진언하였다가 이른바 문방에 연좌되어 청주고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일신의 귀태로움에 대하여서는 아랑곳 없이 귀양길에 올랐다. 모여든 친지들이 위로를 하면 선생은 그저 "명이 있을 뿐이다"하고 문을 닫고 글만 읽었다.

다음해는 서울서 더 멀리 떨어진 영천을 옮겼는데 선생은 팔공산 기슭 고요하고 아늑한 송곡(松谷) 동리에 집을 마련하여 문 마루에 태재(泰齋)하는 현판을 붙이고 시골당에 가르침이 없음을 개탄하여 고을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침에 자질에 알맞도록 과정을 정하여 각기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1415년 일단 귀양길이 풀려서 원주로 갔으나 선생을 모해하는 자들이 임금께 상소하여 다시 옛곳인 영천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제자들을 교훈할 때,

"학문을 하는 길은 이치를 궁리하는데 있고 이치를 궁리함은 마음을 두는데 있으니 마음을 두지 않으면 이치를 궁리할 수가 없고 이치를 궁리하지 않으면 그 학문은 다 구차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파려면 마땅히 먼저 공경하는 마음을 두고 안정하며 그를 읽으되 한밤중에 생각을 깊이하고 낮에는 외워서 음미히여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욱 궁리하여 그 공부가 쌓이고 쌓여 얻는 것이 있게 되면 사심(私心)이 점점 사라지고 천리(天理)가 날로 밝아져서 성현들과 귀추를 같이하여 천지의 화육(化育)하는 이치에 참찬할 수 있겠금 되려니와 한갖 글귀나 따서 기억하고 외우는데 골몰하는 것은 누추할 뿐이다." 하고 또

"나아가 행동하고 물러가 감추는일은 선비의 큰 절개로서 나아가지 못할 때 나아감은 의(義)로움을 잊어버리고 녹(祿)을 따르는 자이니 명(命)을 아는 이가 못될 것이요,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지 아니함은 몸을 깨끗이하는데 치우쳐 인륜을 문란케함이니 도(道)를 아는 자가 못도리라." 하고 또

"누구라도 죽음을 싫어하지 않은 이가 없지만은 군자는 의(義)에 죽는 것은 즐기는 법이요, 누구라도 살고저 하지 않는 이가 없겠으나 대장부는 구차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법이니라," 또

" 선비가 세상에 나서 하지 않으면 말지언정 만약에 하고져 하는 바가 있다면 성인의 글을 외우고 성인의 도(道)를 행하여 밝은 임금을 도와 화육(化育)에 참찬할것이며, 도(道)를 환하게 빛내어 세상을 밝혀야 선비의 책임을 다했다할 것이다."하고 문장과 덕행의 감화력으로 제자를 길렀기에 대전 이 보험(大田李甫欽)선생과 같은 만고 충신 열사가 났으며 사가 서 거정(四佳 徐居正)고 같은 석학을 배출하였고 한편 초야에 있으면서 임금님의 존경을 받아 파격적인 예우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참으로 동양철학자이며, 훌륭한 교육자이니 칭송 아니 할 수가 없다. 평생을 불우와 좌절속에 위난의 나날을 보내면서 조금도 마음의 동요없이 안정을 갖고 불평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분수에 맞는 평안하고 천명을 즐길 수 있는 여유있고 늠름한 심경이야말로 낙천지명(樂天知命)의 대학자이시라.

이에 선생의 덕망을 기리는 후학들이 다시 송곡 옛터에 서원을 짓고 경현사(景賢祠)를 세워 1702년(숙종 임오년)에 위폐를 봉안하고 제향을 울렸는데 그 후 훼철되고 1961년(광복 17년 신축)에 다시 영천군 청토연 애련동에 이건하고 제향을 치루며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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