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자는 택우(宅宇)이고 호는 매음(梅陰)인데 본관은 수성(壽城)으로서 영주시 창진동에 살았으며 1635년(인조13)에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서울의 태학(太學)에 유학했다. 병자호란 때 청병(淸兵)이 쳐들어와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신행(幸行)하니 함께 공부하던 제생(諸生)들은 일시에 흩어져 피신해 버리고 홀로 난에 처하였는데 동지 수인과 더불어 전적(典籍) 정신국(鄭信國)과 함께 깨끗한 곳을 찾아 종사위판(從祠位版)을 매복 한 후 오성위판(五聖位版)만 봉안하고 남성(南城)으로 가서 성문으로 들어가려 하니 청병이 길을 막고 가지 못하게 하자 공은 큰소리로 문성왕 공자 위판을 모시고 가는데 어서 길을 비키라고 하니 호병들이 모두 하마(下馬)하고 길을 열어 줌으로 드디어 남한산성에 도달하여 행재소(幸在所)에 공안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1645년(인조23)에 과거에 등제(登弟)하여 벼슬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이르렀고 또 충청도 괴산(槐山) 수령으로 보직하였을 때는 청백리(淸白吏)로서 모범된 군치(郡治)를 하였다. 1774년(영조50)에 병자호란 때 성인들의 위판을 잘 보호했다고 하여 증이참(贈吏參)에 추봉되고, 사계서원(泗溪書院)에 배향했었다. 저술로는 매음문집(梅陰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