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도청 홈페이지

  1. Home
  2. 경북을 빛낸 인물>경북의 역사>경북소개>경북소개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류빈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인데 1367년(공민왕16) 류극서(柳克恕)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이태조(李太祖)와 동방(同榜)의 과거에 응시하여 1386년(우왕12)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으로는 맹사성방하(孟思誠榜下)의 역전(歷典), 한응교 직제학(翰應敎直提學)등을 거처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말년(末年)에는 영흥(永興,지금의 成興)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역임했다.

특히 태종(太宗)과는 동갑(同甲)으로 태종와 함께 21명이 동갑계(同甲契)를 만들어 친교(親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태조의 조선 건국과 태종의 왕위계승등 조선초기의 혼란한 국가의 건설에 이바지 하였다.
그리하여 태종이 왕에 오르자 이들 중 18명을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봉하고 그 공훈(功勳)을 포상하였으며 죽을 때는 장례(掌禮)의 예우를 특별히 하였다.

태종은 이 갑계를 위해서 어제시(御製詩)를 지었는데 "한나라에서는 12人의 큰 공신을 봉했으나 이 해에 이 사람들과 더불어 창업을 했도다. 지금 나는 오직 동갑계 21사람은 삼각산 무너져도 영원히 버리지 않으리라."라고 읊었음을 볼 때 이들의 공훈과 예우등을 짐작할 수 있다.

류빈은 영흥 대도호부시를 지낸 후 졸(卒)하였는데 태종은 "나 비록 왕이 되었지만 그대들도 똑같은 많은 군졸(軍卒)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벌꿀 100통을 하사하고 나라의 풍수로 하여금 전국 명산을 밟게 한 다음 지금의 영풍군 문수면 승문리에 임금과 같은 예우로 그 묘를 종능(鐘陵)으로 봉했다. 이 능의 형상은 소백산의 옥녀봉(玉女峰)이 탄금대(彈琴台)를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하여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고 한다.

당시 한양(漢陽)에서 이곳까지 500리 길을 관군들이 상여로 운구(運柩)해 왔는데 아직까지 이 마을에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또한 이 종능을 쓰려고 할 때 그 곳엔 이미 쓴 엄씨(嚴氏)의 묘가 2기(基)가 있어서 후손들이 압장(壓裝)을 못하도록 방해를 하였으나 관졸들은 그 후손 2명의 목을 베었더니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능은 왕능에 준하는 격식(格式)으로 만들었는데 5척의 장대석 2단, 석척 8각묘를 하고 있으며 상석(床石), 향로, 문무장군석(文武將軍石)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능의 관리를 위해서 제사(祭舍)를 마련하였는데 제각(祭閣)과 8각기둥등 특수한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고, 임야 220정보, 전답 24부 9속(현금 1,500평)을 하사하여 그 수곡(收穀)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해마다 이것을 어사(御使)가 나가 감사(監査)를 하였다.

이러한 제사등의 관리(管理)가 임진왜란 이후 중지되었고, 해방후 토지개혁으로 전답을 소실하였으나 남은 약간의 위토(位土)로 후손들이 해마다 제사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종능에 관한 재산지적도(財産地籍圖), 노비문서, 감세신청원, 암행어사감사록등 귀중한 자료가 후손에 의해 소중히 보존되고 있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