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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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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옥

동곡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721년(경종 1년)
시대

상세설명

노 이옥 진사의 호는 동곡(東谷)이요, 지금의 영천시 대창면 직천동(永川市大昌面直川洞)에서 서기 1721년(경종 1년) 10월에 탄생했던 것이다.

동곡 선생은 젊었을 때도 공부에 힘썼지만 늙어서 더욱 공부에 열중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50여세가 되어 말을 타고 여행 도중에 어떤집 하인이 급히 길을 가다가 편지 한통을 끄집어 내어 거기에 뭐라고 씌었는지 읽어봐 달라한다. 선생은 편지를 받아 들었으나 초서로 급히 갈겨 쓴 글씨요, 글 내용도 어려운 문구로 쓰여져 있어 도저히 해득할 수 없으므로 한참이나 애썼지만 끝내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판인데 하인이 짜증과 모멸하는 목소리로

"제기랄! 글도 모르는 주제에 양반이라 합시고 의관망(衣冠網)하고 마상(馬上)해 다니다니! 공연(空然)히 남의 바쁜 걸음만 늦춰 놓고 마는구나! 애햄 재수 없는 사람 다 봤네!"

하고는 휑하니 달아나 버린다. 뜻밖에 큰 봉변(逢變)을 당한 동곡은 자기가 공부에 대해여 자만(自慢)하고 있었음을 크게 깨닫고 그 길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 청도(淸道)에 있는 수암사(守巖寺)란 절에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였으므로 자나 깨나 눈 앞에는 글씨만이 훤히 떠오르곤 하였다.

하루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 오는데 길바닥에는 온통 글자토성이라 그 글자를 피하여 걸어온다는 것이 30리 산중(山中)길을 석양에야 다왔다는 일화가 지금도 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동곡은 만년에 지금의 영천시 청통면 신원동(永川市 淸桶面 新源洞)으로 이거했는데 여기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진사가 되어 돌아올 때 따라온 광대(廣大)들이 한바탕 놀았는곳이 광대진(廣大陳). 술레잡기를 하여 떠들어댄 곳을 술레바탕(지금은 와전하여 수끼바탕이라 함)이라 부르게 되어 지금도 그 분의 영광을 아로새기는 장소가 되고 있다.

소암(小庵) 노 수(盧遂) 선생께서 스승인 퇴계 이 황 선생의 예안(禮安) 향약을 본 따서 만든 모사동(현 대창면 일대) 항약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차차 흐지부지 되었으므로 동곡 선생은 이것을 개탄하고 고향인 직천과 이웃 네마을을 합하여 본촌향약(本村鄕約)을 만들었다.

그 조문(條文)은 모사동 향약과 대동소이(大同小異) 하였지만, 동민들과 더불어 새로운 각오로 예속(禮俗) 의 부흥을 굳게 다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서기 1791년 2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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