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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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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구

동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91년(고종 28년)
시대

상세설명

죽사 남규원(竹史 南 奎元) 선생의 셋째 아들로서 1891년(高宗 28年 辛丑) 영양읍 옥골(玉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중형(仲兄)의 아호 북산(北山)을 따라 동산(東山)이라 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으나 학교 교육은 구한(舊韓) 말기(末期)의 사립 영흥학교를 2년간 통학했을 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향학열이 강한 선생이 중형과 아우는 전문학교까지 진학시키면서 자기는 진학시키지 않는 부모를 원망함직 하건만, 조금도 불평 없이 신학문(新學問)에 관한 책을 사서 독학(獨學)을 하였다. 본디 총명하고 재질이 출중하여 독학으로써 능히 보통학교와 고등 보통 학교 출신들을 능가(凌駕)하는 실력을 쌓아, 영양 군청의 서기(書記)로 취직하였다. 여러 고을의 군청으로 영전, 승진을 거듭하여 청송 군수가 되었다. 신구 학문에 능통하여 한시(漢詩)를 잘 지었으며 일본말도 능하였다.

8.15해방을 맞이한 미군정 시대에 안동 군수에 취임하여 이른바 안동 웅부(安東雄府)(安東市가 독립되기 前임) 해방 직후의 복잡한 군치 행정을 능란한 행정 역량과 원만한 공무 집행을 했으므로 안동 군내의 유지층에서 탄복하였었다. 안동의 기독교계의 원로인 김 진호(金 鎭浩) 목사가 남 군수의 맏조카를 보고 <완장(阮丈)영감의 군 행정과 통계 수리에 밝은 총명한 재질에 탄복했소>라고 말하였다 하니 과연 짐작할만하다.

영양에 있는 의령 남씨의 화수정(花樹亭)과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그 밖에도 여러 고을의 누정(樓亭)에 남 군수의 한시(漢詩)가 여러 선비들의 차운(次韻)과 함께 게시(揭示)되었었다. 짐작하건데 해방후의 시장이나 군수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아니 6학년의 절반(折半)도 교육받지 못한 이는 선생 외에는 없으리라.

남 군수의 맏집 둘째 조카는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졸업일 뿐 독학으로 여러 가지 시험 합격을 거쳐 고등고시에 합격하였으니 한 가문의 숙질이 독학으로 성공했음으로 하여 지금도 가정이 어려워 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독학으로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좋은 교훈(敎訓)을 남겼으리라. 선생은 59세인 1949년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 영영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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