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도청 홈페이지

  1. Home
  2. 경북을 빛낸 인물>경북의 역사>경북소개>경북소개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남정팔

의춘,북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87년(고종 24년)
시대

상세설명

호는 의춘(宜春) 또는 북산(北山)이니, 의령 남씨(宜寧 南氏) 22세 손이며, 양정공(良靖公 高麗朝의 宜城君 政堂文學大提學 및 詩倭元帥補祚功臣 諱는 佐時)의 18세손이요 죽사 남규원(竹史 南 元)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887년(高宗 24年 丁亥) 영양읍 옥골(玉洞 現 西部2洞 西溪書塾옆)에서 태어났다.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고 지사(志士)의 기풍을 타고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빼어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쉽게 배워 익혔으며, 지리(地理) 역사, 박물(博物) 수학 등 신학문(新學問)에도 통달(通達)하였다.

1910년(庚戌) 가을에 국권(國權)을 왜적(倭賊)에게 빼앗기니 선생은 사무치는 통한(痛恨)을 하늘 우러러 통곡하고, 민족의 자주 독립(自主獨立)과 나라 되찾기에 신명(身命)을 바치리라 다짐하였다. 그 당시 모든 선각자(先覺者)들은 나라 잃은 원인은 민중이 무지몽매(無知蒙昧)한 탓이라. 민중 계몽과 교화가 급선무임을 깊이 인식(認識)하고, 우선 자기 실력부터 양성(養成)하려 이른바 형설(螢雪)의 공을 쌓기에 힘썼다.

1913년(癸丑) 회천(回天)의 큰 뜻을 품은 선생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고려대학교의 前身) 법과에 입학하였다. 그 때의 동기동창들 중에는 훗날 경향(京鄕)의 유명인사(有名人士)된 이가 많았다. 사학의 권위자인 이병도(李丙燾), 조국광복후 대법원장이 된 김용무 (金用茂), 동향인 서예가 서주 오희태(西州 吳熙台), 우산 이현방(愚汕 李鉉邦)등이 보전법과의 동기생이었다. 입학한지 오래지 않아 전교생이 우이동(牛耳洞)으로 소풍갔는데 백일장이 열려 선생의 시(詩)가 장원(壯元)이 되었다. 전문학교 3년 학업을 차석(次席)으로 졸업하고, 이역만리(異域萬里) 중국 북경대학에 유학하는 한편, 교포(僑胞)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그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要人)인 김구(金九) 주석을 비롯하여 이시영(李始榮), 신익희(申翼熙), 신채호(申采浩), 김창숙(金昌淑) 등 수많은 동지들과 친하게 사귀어 힘을 합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특히 중국어 실력이 능하여 중국어, 중국소설을 유창하게 읽으며, <중국어 자통(中國語 自通)>이라는 책을 지을 만큼 중국어에 능통한 선생은, 중화민국(中華民國) 대총통(大總統) 원세개(遠世凱)를 방문하여, 한국 독립 운동을 원조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고, 광복군의 군자금을 모금하려 국내와 중국을 8번이나 왕래하느라고 물려받은 가산(家産)을 모두 없앴다. 선생의 시집(未刊行漢詩集)을 보건데,

안동현에서 읊다(抵安東縣吟)
낮에 천진에 이르다(午到天津)
새벽에 산해관에서(?抵山海關)
저물어 요양에 들어가다(幕入遼陽)
새벽에 용흥강을 건너다(?渡龍興江)

라는 시외에도 북경서 읊은 시도 몇 수 있어, 여러 번 중국에 출입했음이 역력하다. 어느 장시(長詩)의 첫 귀에 "나라 망한 신세 부평초 같아 일곱번 요하(遼河)를 건너고 또 이렇게 간다.(國亡身勢似浮萍 七渡遼河又此行)아아 나라 망한 백성의 부평초 신세! 이처럼 빼앗긴 나라의 안팎으로 여러 번 오가면서 비밀 활약했어도 왜경(倭警)에 잡히지 않았음은 하늘의 도우심이기도 하려니와 워낙 선생의 비범(非凡)한 두뇌와 민첩(敏捷)한 행동의 보람이었으리라. 북경에서 고국 영양(英陽)의 아버님 수연으로 귀성(歸省) 할 때에 친형제 같이 지나던 단재 신 채호(丹齋 申 菜浩)가 지은 춘당(椿堂) 수연축하시가 잡지에 발표되기도 했으며 그 잡지에는 선생의 3형제의 시가 여러 번 게재(揭載)된 바 있었다.

9월 14일 고 북산 남정팔 선생 영양군민장(故北山南廷八先生英陽郡民葬)을 영양읍내 중앙통로의 가장 중앙지점에서 영결식(永訣式)을 엄수(嚴守)하였다. 수많은 군민들과 수많은 조사(吊辭) 가운데서 영양초등학교 학생 대표의 어린 저희들을 귀애하시던 큰 어른을 우러러 추모하는 천진하고도 눈물겨운 글월을 떨리는 음성으로 낭독하였다.

조문석(趙文錫) 군민장 장의위원장(葬儀委員長)의 만사(輓詞) 가운데 "맑기는 가을 물이요 의리는 서릿발같았어라(淸如秋水義如霜)"하여 선생의 인품을 잘 나타냈으며 선생과 동갑인 조헌기(趙獻基)선생은 "강개한 지조와 백옥 같고 흰눈 같은 맑고 고운 얼굴, 고결한 덕행, 넓고 큰 글재주(薑桂之操 玉雪之姿 高潔之行 浩澣之文)"이라 하여, 선생의 송죽 같은 절개와 추상같은 정의감, 넓고 풍부한 학식과 높은 인격을 추모하였다.

선생이 별세했음을 전해들은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옹(翁)이 "아까운 옛 동지가 세상을 떠났구나"하고 심히 애석(哀惜)해 하였다. 왜정시대(倭政時代)에는 독립운동가이요, 조국 광복 후에는 향토의 스승인 선생이 우리 고장에 났음을 자랑과 긍지로 선생의 뜻과 얼을 길이 이어 받들어야 하리라.

참고문헌 : 영영군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