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도청 홈페이지

  1. Home
  2. 경북을 빛낸 인물>경북의 역사>경북소개>경북소개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남성로소모장부부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남성로(南 聲魯) 소모장은 관향인 영양 입암면 문해(汶海)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수려(秀麗)하기 옥골(玉骨)이요 수재로서 글 잘 짓고 바둑에도 능수였다. 경술년 나라 망하기 전후에 국권(國權) 탈환을 위하여 안동 류 시연(柳 時淵) 의병대장의 휘하에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각처에서 왜적과 전투하였다.

1910년(庚戌) 8월 울진군 죽변에서 일본인의 점포(店鋪)를 빼앗으려 하다가 체포되었다. 왜적이 고문(拷問)하기를
"왜 남의 상점을 약탈하는 강도죄를 범했는가?" 물으니 장군이 대답하기를 "너희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으므로 이를 회복하기 위한 의거(義擧)에 군수비(軍需費)가 떨어져 부득이 적산(敵産)을 되찾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하고 조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늠름하여, 가상(嘉尙)히 여긴 적이 죽여 없애기에는 아까운 인재라 생각하여 달래기를 "이왕 잘못을 뉘우쳐 우리 일본에 귀화(歸化)하면 용서하고 좋은 직책을 맡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으니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잘 살도록 하라."권고했으나 "너희 왜적에게 항복할 수 없으니 잔말 말고 죽여라."하여 순절(殉節)하였다.

그 부인 의성 김씨는 안동군 임하면 내앞(川前)에서 영양 입암면 문해에 거주하는 남성로(南聲魯)에게 출가 왔다고 이웃사람들은 이 부인을 "내폿댁"이라 불렀다. 부인은 용모가 수려하고 키가 훤칠하여 보기에 여장부의 자태였었다. 부부 함께 수려한 미남자에 미인이라 천생연분이라고들 기리었다.

남편이 죽변에서 순절했다는 부보(訃報)를 들은 부인이 수 십리 밖에 있는 시체를 찾아와서 장례를 치르기 전에 이웃 부인네들을 모아서 술과 안주로 대접하며 말하기를 "정든 여러분과 오늘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되었어요."하고 저으기 섭섭해하는 기색이더니, 그 날 밤에 비상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한 사람의 소생(所生)도 없이 순절한 젊은 열사(烈士)와 열녀(烈女)인 부부를 동민들이 뜨거운 눈물로써 한 무덤에 합장(合葬)하였다. 얼굴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정신 또한 아리따웠으니 그 방향(芳香)은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을 그윽이 울린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