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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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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석희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영양 남씨(英陽南氏) 23세손인 남조휘(南朝輝) 선생의 3남 4여 가운데 맏딸로서 1900년(高宗光武 4年 庚子) 영양면 앞싯골(前谷洞)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정숙 단아(貞淑端雅)한 태도로 양친께 효순 하여, 어버이의 뜻을 조금도 어긴 적이 없었다. 방년(芳年) 16세에, 15세인 청주 정씨(鄭載英)와 혼인하였다.

아직 신행(新行)전인 어느 날 밤에 뜻밖에 시댁으로부터 시숙(媤叔)이 와서 전달하기를, 시모 권씨의 숙환(宿患)인 속앓이가 근래에 격화되어 백약이 무효라, 죽음 직전에서 최후의 유언으로 아직 신행 전인 새사람을 잠깐이나마 대면해 보고 죽기 원이라 한다 하니, 이 말을 들을 부모와 딸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열 여섯 살 신행 전 새댁이 즉시 시숙과 함께 산골짜기 좁고 험한 밤길 10리를 걸어 양평동(良坪洞) 시댁으로 갈 때에, 겨울 바람이 세차게 불어 휘날리는 치맛자락을 감싸쥐고 발걸음을 재우쳤다.

시댁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경인데, 이미 절명(絶命)한지 두 시간 가량이나 된다는 시모 권씨의 시체에 흰 홑이불이 덮여있고, 방안에는 곡성이 낭자하였다. 그 경황없는 때에 무엇의 장난인지 방문에 흙을 끼얹는 소리가 나므로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두 눈에 화경 같은 불을 켠 호랑이가 뜰에 도사리고 앉아 있지 않은가? 모두들 크게 놀라고 그 중에는 흉조(凶兆)라고 걱정 하는 이도 있었다. 범이 밤길 걷는 새댁의 뒤를 밟아서 온 것이리라고 들했다.

방안에서는 시신(屍身)을 덮은 홑이불을 치켜들고 처음 온 새 며느리에게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이니, 돌처럼 싸느란 얼굴, 이미 입 언저리에 붉은 물(시汁)이 흘러 있었다. 이 처절(悽絶)한 상황을 목도(目睹)한 어린 며느리의 머리에 영감(靈感)처럼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민첩(敏捷)하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곧 부엌으로 들어가서 왼쪽 손 무명지(藥指)를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사정없이 내리치니 몽창 끊기는 것을 오른편 손으로 굳게 감싸쥐고 방안으로 달려 들어오니, 모두들 놀라며 감동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고들 절망이었다. 다못 그 놀라운 효성이 가상(嘉尙)하여, 시체의 입을 벌리고 그 피를 방울방울 드리웠을 따름이었다. 피가 목안으로 흘러 넘어 갔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효성이 벅차 단지(斷指)한 새댁은 범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생혈(生血)을 마시운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단념했는데, 이윽고 시체에서 가늘게 숨쉬는 소리가 들리고 감긴 눈이 스르르 뜨이는 것이 아닌가? 효성 어린 생혈이 시어머니의 심장과 혈맥에 소통했음인가, 기사회생(起死回生)이었다. 그 집안에 모였던 이들의 이 기적적인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은 무어라 형언하랴. 범은 어느 사이엔지 가버리고 없으니, 효수(孝獸)라고도 하며 산군(山君)이라 일컫는 영특한 짐승인 범이 여사의 효성에 감동되었으리라. 효부의 수혈로 소생(甦生)된 시모의 나이 42세였는데, 그 후 11년간 생활하는 동안에 막내아들을 낳기도 했다.

효부의 뼈까지 끊긴 손가락은 송진(松津)을 바르고 나무 껍질로 싸매였더니 몇 날이 지난 후 상처의 흔적도 없이 완전히 나았다. 이 사실을 아는 이 마다 그 어린 마음에서 우러난 출천지효(出天之孝)라 끊긴 손이 탈나지 않고 쉽게 고이 나았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예로부터 약지(藥指)의 피를 바친 효자가 간혹 있었거니와, 열 여섯의 어린 나이로, 게다가 신행 전이었으니 한번 뵈온 적도 없어 정들 나위 없는 시어머니를 위해 뼈를 끊어 피를 바치다니? 진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효부가 시부모 봉양을 어떻게 했으리라 함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후에 영양 유도 진흥회장(英陽儒道振興會長)과 영양 경찰서장 및 유도회 경상북도 본부위원장으로부터 효부(孝婦)표창을 받았다. 남석희(南 石羲) 여사는 효부와 양처에다 4남 4녀의 어진 어머니로서, 50년간 가까운 결혼생활을 하고 1963년(癸卯) 음력 10월 10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였다.

百行首先最孝欽 弱齡出跡感天心
人生有此誠稀古 史已無難是現今
義氣閃閃同陪虎 倫風烈烈自綠琴
聊知點血能甦命 不朽令名鐫石深
漢陽 趙 珪錫

참고문헌 : 영양군지, 鄭氏婦孝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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