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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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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규원

영소/죽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56년(철종 7년)
시대

상세설명

영의공(英毅公)의 후예인 의령군(宜寧君 高麗 忠烈王時代 樞密院直副使 諱는 君甫)의 21세손이며, 의성군 정당문학대제학(宜城君 政堂文學大提學) 및 토왜원수(討倭元帥)로서 보조공신(補祚功臣)인 양정공(良靖公 諱는 佐時)의 17세손이요, 남 순완(南 順完) 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856년(철종 7년) 영양읍 옥골(玉洞 現西部 2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영소(泳韶)요 호는 죽사(竹史)이다.

어릴 적부터 얼굴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총명하여 글 재주가 비범(非凡)하고 기질이 영특(英特)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2세 소년 시절에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했던 어느 날 밤중에 청기(靑杞) 솥발이(鼎足洞)에 머물러 있는 유명한 한의원을 찾아 12살인 소년이 나섰다. 워낙 가난했던 집안이라 어른을 품꾼으로 보낼 형편이 못되는 처지었건만, 어머니는 기특하기는 하나 될 말이 아니라 말릴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위독하신 데 어찌 지체하겠습니까? 늦어도 새벽까지는 꼭 약을 지어 가지고 돌아오겠어요."
어머니는 어처구니없어서 "이 철없는 것아 호랑이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태산 준령을 이 한 밤중에 어린 네가 어떻게 혼자 넘어 간단 말이냐?"하고 타일렀다.
"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하고 발을 굴리면서 집안에 남은 엽전(葉錢)꾸러미를 다 털어 허리에 감아 매고 짚신에 신들메를 매고 막대기 하나를 단단히 잡아 쥐고는, 붙잡고 말리는 어머니의 손길을 뿌리치며 삽짝(門)을 나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음력 스무 날 이지러진 달빛이 희끄므네 비취는 것을 등불 삼아 험한 산길을 걸을 때에 멀리 가까이서 짐승의 우는소리에 멧봉우리가 우르렁 울리니 머리털이 쭈뼛 치솟고 등골이 서늘했지만, 소년은 위독하신 아버지의 약을 지으러 이 밤중에 험한 산을 넘는데 아무리 짐승이기로서니 감히 덤벼들 가보냐? 만약 호랑이든 늑대든 여우든 덤비기만 해봐라 이 막대기로 치며 목숨걸고 싸우리라. 혹시 강도가 튀어나와 돈을 빼앗는다면 이 막대기로 골통을 때려 눕히며 이 돈을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는 약값 외에는 쓸 수 없다고 호통치리라. 이렇게 마음을 다져 먹으니 짐승들의 우짖는 소리가 들렸어도 효성이 지극한 소년에게는 조금도 무서움이 없이 오히려 용감 담대한 마음만 싹텄다. 범이 넘어 다닌다고 "범넘이"라 이름하는 검성골 재를 넘어, 솥발이 동리에 들어갔다.

의원이 어느 집에 유숙하는지 알 길 없었으나, 워낙 영리한 소년이라 재빨리 가늠하여 어느집 사립문을 흔들고 소년의 음성 같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로 깊이 잠든 사람들을 깨워서 통사정하고, 의원을 깨워 아버지의 병 증세를 설명하며 애원하니, 의원뿐 아니라 잠에서 깬 사람마다 뉘라서 놀라지 않으며 감동하지 않았으랴. 억척같은 장정(壯丁)이라도 한밤중에 혼자 넘어오기 어려운 태산준령 인가(人家)란 한집도 없는 15리 길을 이 어린 소년이..... 지어주는 약첩(藥帖)을 들고 의원에게 "고맙습니다." 큰절을 드려 인사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단잠을 깨우고 폐를 끼쳐 미안합니다."하고 몸을 돌려, 갔던 길과는 달리, 솥발이에서 댓두들(竹邱)을 거쳐 청기동 마을앞 들길(野路)을 지나 청기재를 넘어가는 것이었다.

재 이름은 행곡령(行哭嶺), 워낙 험준(險峻)하고 고개 넘는 길이 굽이굽이 염소 창자 모양으로 꼬부랑꼬부랑하여 울며 넘어 다닌다는 행곡령 고갯길을 넘는데, 뒤꼍에서 불줄기가 비치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돌아보니 큰 범 한 마리가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등골이 오싹했으나 소년은 이내 마음을 편안히 가눌 수가 있었다. 범은 산중영물(山中靈物)이라 함부로 의로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 들었음을 생각하고 겁없이 앞만 보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길다란 팔싯골 길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에, 먼 마을에서 첫닭 우는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뒤따라 오던 범은 소년의 어기찬 효성에 감복(感服)한 듯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이 감동하고 범이 감동한 어린 효자가 가져온 약을 다려 마신 아버지의 병이 나았음은 당연하다.

지금은 팔싯골에 새마을의 집단부락을 이뤘으며, 1969년에 행곡령을 무너뜨리다시피 하여 청기면으로 넘어 다니는 찻길을 닦았지만, 100여 년 전엔 새바들과 검성골 재를 넘어 솥발이까지, 그리고 돌아서 행곡령을 넘어오는 깊은 밤중, 솥발이 외엔 무인지경인 태산준령 30리 길을 12세 소년이 혼자 넘어 다녔으니, 그 하늘에 사무치는 효성과 대담무쌍한 간담에 뉘라 경탄(驚歎)하지 않을 수 있으랴.

1932년(壬申) 별세하니 향년 77세이다. 장례(葬禮)에 서울서 송진우(宋 鎭禹) 서상일(徐 相日) 이인(李 仁)등 명사(名士)의 조전(吊電) 조장(吊狀) 및 수많은 만장(輓章)이 나부끼고 500여 명의 조객이 애도하였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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