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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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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몽뢰

중준/이계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620년(광해군 12년)
시대

상세설명

1620년(광해군 12년)에 점곡면 사촌동 월촌서 태어난 남몽뢰의 자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伊溪). 그는 소싯적부터 총명이 남달라 13세 때도 백일장에서 수석 입상했고 23세 때는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다.

32세 때 문과에 자원 급제한 뒤로 성균관 학유, 전적 및 병조와 예조의 정랑, 함양군수, 통례원 우통례, 선산부사, 진주 목사 겸 진주진 병마첨절제사 등을 지냈다. 1659년(효종 10년) 기해 예론 때는 미수 허목, 고산 윤선도 등과 같이 송시열, 송준길, 김수항 등 서인들의 논거에 반대 정론을 폈고, 1680년(숙종 6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실각할때 공도 연루되어 전라도 흥양에 유배, 서인들의 모함으로 이듬해 서울로 호송 도중 남원 객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향년이 62였다.

공은 그 문장이 일세에 뛰어났고 성리학과 예학 등의 공구가 깊었으며 정치적 신념이 워낙 투철하였던 관계로 평생 절의를 굽혀 본 일이 없었다. 경신 대출척 때만 해도 천여명의 남인들이 옥사, 사사, 파직, 유배 등으로 희생될 때 자결한 사람은 오직 공뿐이었던 것이다.

그가 축조한 이계당은 원래 초가 3칸이던게 실화로 폐허화 그 현손 시의가 와가 12칸으로 재건했는데 재차 실화 현재 그 사랑채만 보존되어 온다. 유림에서 공을 기려 세운 이산서원은 대원군때 훼철되었고, 그의 문집 8권이 전하고 있으며 1978년 그 후손이 국한문으로 엮은 '이계선생실기'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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