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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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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명옥/야옹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백암(栢巖) 김늑의 후예로 영주의 동포(東浦)에서 세거(世居)하였으며, 1856년(철종7)에 태어났다. 성진(聲振)은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많은 글을 읽지 못하였으나 재주가 뛰어나고 시부(詩賦)를 좋아하였으며, 1902년(고종39)에 혜민원(惠民院) 주사(主事)가 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의 변고(變故)가 일어나자 의상(衣裳)을 찢으며 서향(西向)하여 통곡(痛哭)을 했고, 자결(自決)을 결심하고 수일도안 절식(絶食)하니 모친 권씨(權氏)가 "너가 죽고 내가 살면 무엇하리요."하며 또한 먹지 않으니 성진이 다시 음식을 먹으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어머니 때문에 죽지는 못하나 하늘을 어찌 쳐다보리요."하며 삿갓을 쓰고 다녔는데 그 기개(氣慨)를 모두가 장하게 여겼다.

1912년에 모친이 돌아가시니 또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도현(道鉉)이가 원유(遠遊)에서 돌아오지 않아 이루지 못하였으며, 1915년에 이르러서는 「전일에는 어머니가 있어서 죽지 못하고 지금은 아들을 기다리다 죽지 못하면 나는 죽을 날이 없지 않느냐」고 하며 스스로 만시(輓詩) 한 수(首)를 지어 놓고 절식을 하였다.

군수(郡守) 장윤규(張閏圭)등이 의원(醫員)을 데리고 와서 여러 가지로 회유(回諭)를 하였으나 "내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두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며 크게 꾸짖어 물리치고 시자(侍者)에 업혀서 목욕(沐浴)을 하고 북향사배(北向四拜)를 한 후 1915년 2월 21일에 59세를 일기로 한 덩이의 피를 토하며 두 주먹을 움켜 쥔 채 왜국(倭國)의 침략에 한을 품고 스스로 죽어갔다고 한다. 김성진은 이렇게 국가의 비운(悲運)을 슬퍼하며 굶어서 목숨을 끊은 이 고향의 열사(烈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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