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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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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장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선장(善莊)이요 본관은 청도(淸道)로 영헌공 김지대(英憲公 金之岱)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고 고려 충혜왕(忠惠王)때에 조적(曺적)의 난리를 평정하였다. 왕이 교지(敎旨)를 내려 말하기를 <시종(侍從)하는 신하가 처음이나 마침에 한결 같이 과궁(寡躬:임금)을 곁에서 도왔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쫍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평평하게 될때 까지 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1340년9충혜왕 복위 1년) 조적의 난이 일어나후 왕이 원나라에 불리어 갈때대호군(大護軍)으로서 왕을 호종(扈從) 한 공으로 1342년(충혜왕 3년)에 1등 공신이 되어 공신각(功臣閣)의 벽에 얼글을 그렸다. 선생의 공으로 청도군의 격(格)을 승격하여 주치(州治)로 하고 도주(道州)라 불리우게 된것 같다.

이듬해에 왕이 원나라에 잡혀 간후 환관 고용보(高龍普)에게 잡혀 투옥 되었다. 이로 인해 청도군이 격하되 청도현으로 뒤돌아 간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이 졸한후 왕이 관음방(觀音房)에 행차 하였는데 이는 벽신(壁臣)인 성생의 기일재(忌日재)를 베푼 때문이라 하였다.

조적(曺적)의 난은 고려 제27대 충숙왕이 죽자 1339년(충숙왕 8년)에 왕위계승(王位繼承)의 쟁탈전이 일어나서 심와 고(審王 暠)의 당파인 조적이 병(兵)을 일으커 왕궁을 내습(來襲)하다가 조적은 패주(敗誅)되고 고(暠)는 원나라로 도망한 후 전왕인 충혜왕(忠惠王)이 재차 왕위에 올랐다.

참고문헌 : 영헌공실기, 동국여지승람, 도주지, 도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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