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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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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몽룡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호장(戶長-縣司의 우두머리) 김몽룡은 1734년(영조 10년)에 출생하였다. 70평생을 집에 들어서는 부모에 효성하고 동기간에 우애를 돈독하게 하였고, 밖에서는 공무에 근면 충실하고 청렴 결백하면서도 항상 불쌍한 사람을 도운 온정의 사람이었다. 어려서 아버지을 여의고 50세에 이르도록 홀어머니에 지성으로 효도를 다하였다. 노모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항상 끊지 않았고 어떠한 음식이라도 먼저 입에 넣는 일이 없었고 병환이 계시면 손수 약을 다렸고 공무로 객지에 갔다가 돌아오면 반드시 토산물을 가지고 와서 받치는 일 등을 평생동안 한결같이 다하였다.

노모가 80세에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입에 피를 드리우니 하루를 더 회생하였고, 운명하시자 닷새를 먹지 않고 밤낮으로 호곡하였다. 어머니의 관을 아버지의 무덤에 합장하게 되었는데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젊을 때 돌아간 아버지를 애통히 생각하여 왼쪽 손가락을 끊어 흐르는 피를 아버지 관 속에 받쳤으니 애절한 추모의 정이었다. 3년간 상복을 입고 묘앞에 엎드려 호곡하였으니, 사대부 계급이 아닌 서민에 있어도 3년 복을 입는 것이 비로소 번지게 되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의 참마음은 형제에게도 마찬가지이었다. 출가한 누이가 가난하여 자녀를 데리고 신병으로 친정에 왔다.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김몽룡은 자신도 50세가 넘었는데 5년간 약을 다리어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겨울이면 손수 구들에 불을 지피다가 눈썹을 태운 적이 있으니 병중의 누이가 그것을 보고 목메어 흐느끼기도 하였다. 이웃에도 남달리 온정을 베풀었고 친지나 상하를 막론하고 장례를 돌보고 가난한 집을 위하여 제 손으로 염도 하였고, 해마다 그믐에는 고을의 늙은이를 고기반찬이나 금전으로 위로하였고, 의탁할 데 없는 사람이 죽으면 스스로 관을 사서 후히 묻어 주게 하였다.

평생을 이방, 호장을 지냈지만 집에 축재한 것이 없이 가난하였으니, 공직에 있어 청렴 결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십년을 공직에 있으면서 재치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었고 눈에 띄는 것은 일체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그가 일하던 수십년간 공공건물 어느 하나 손데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필재가 우수하였으며, 현사의 정문에 그가 쓴 달필의 "仁山縣司(인산현사)"의 편액이 지금도 서림 숲 시중당에 보존되어 있다. 그가 만약 사대부 집에 났더라면 세상이 요구하는 큰 사업을 이룩하였을 것이라고 그때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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