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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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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6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해조류(海藻類)도 예법에 어긴다고 안 먹었으며 부친상에는 시묘했으니 당시의 뛰어난 효자였다. 전라어사가 되었을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자랑하던 전주 부윤도 공이 어사가 되어 호남으로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스스로 인끈을 풀었다니 고의 성격이 강직함을 알겠고 울산 부사로 재임 중 왜구의 노략질이 있을 때 신속히 출동하여 도적을 물리치고 뒤늦게 달려온 병사(兵使)에게 "주장(主將)이 겁을 먹으면 이 나라의 안보를 어찌하랴" 하여 일신의 편암함보다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

또 당시의 "감사가 순시(巡視) 온다"는 기별을 받고 지경까지 가서 마중했으나 감사는 다른 곳에서 술마시고 오지 아니하므로 "감사가 공연히 바쁜 백성을 피곤하게 하는구나" 탄식하고 또 권문세가에 바칠 예물을 요구하므로 "어진백성의 가난한 재물을 긁어다가 살찐 세도가를 더욱 부자되게 할 게 무어냐"고 대들었으며 감영에서 비장이 감사의 선조 제사에 쓸 것이라면서 울산의 토산품을 거두어 가는 것을 잡아 가두고 사유를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가 겉으로는 좋은척 하고 속으로는 분히 여겨 최상으로 보고한 고과장(考課狀)을 다시 찾아다가 최하로 고쳐서 올렸다.

안동군 임하면에서 진(璡)의 다섯 째 아들로 태어나 이곳 용문면 죽림동 남악골로 분가하여 살았으니 학봉 김성일의 아우다. 자라나면서 학문에 뜻을 두어 퇴계 문하에서 몇 해를 공부하니 학문과 덕행으로 세상이 소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고 성품이 청렴강직하여 굽힘이 없었다.

1564년(명조 19년) 진사를 거쳐 1570녀(선조 3년)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1575년(선조 8년) 성균관 학유로 부임하고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전라도 어사로 나갈 때 공의 청렴 강직함을 듣고 탐관오리들은 김어사가 났다는 말만 듣고도 겁이 나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는 자가 있어 이 지방의 부패한 관리들이 숙청되었고 1584년(선조 17년) 강원도사로 도임하니 당시의 강원도 감사 정곤수가 모든 공사를 서로 의논하여 결정 했으며 1587년(선조 20년) 울산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백성을 아끼고 공사를 엄정히 하여 청백리의 본을 보였으니 이임한 뒤에 군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지금까지 울산 향교 뒷뜰에 서 있다. 그의 옛집에는 지금도 가학루란 현판만 남아 그의 청렴강직한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 연방세고, 의성김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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