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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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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병

성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영천(永川)
출생시기
1557년(명종 12년)
시대
조선 선조

상세설명

선재 최문병은 영천이 본이며 1557년(명종 12년)에 출생하였다. 4∼5세에 시를 외우고 천지복재의 이치를 알았다 할만큼 총명하였다. 또 어느날 향인들과 더불어 주연을 베푸는데 별안간 폭우가 쏟아지며 벼락이 떨어지니 좌중의 향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넘어지며 대경 실색하였는데도 오직 최문병은 태연자약하게 여전히 잔을 들고는 추호의 안색의 변함도 없는 의연한 풍채이었다 하니 그 담대한 도량을 헤아릴 수 있겠다.

임진에 왜군이 침공하기 두 해 전, 경인년 여름 어느 밤에 손님과 함께 앉아 노는데 낯 모르는 장부 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장차 큰 병화가 있을 것이니 한 고을 생령은 공이 아니면 구제할 수 없을 것이오"하고 말을 마치자 장부는 어디론가 살아졌다. 임진년의 국난을 최문병이 예견하였음을 뜻한 일일까. 평소 문달을 구하지 않고 은거하여 학문에 힘써오던 중 1592년 최문병이 36세 때 임란이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왜구에 각 고을의 관군이 모양없이 패주하니 최문병은 인근 어느 고을에 앞서서 용약, 향리에 의거를 격려하니 마을마다 장사들이 모여 최문병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천장산에 웅거하니 따르는 자가 수천이었다. 왜구가 침범해 오는 요소 요소에 모든 의병을 매복시키니 그들이 마음놓고 침공해 오는지라 일격에 무찌르고 적으로 하여금 감히 자인현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과 합세하여 두곡에서 왜적 수 백명을 죽이고 선암(청도 금천)에 있는 적을 막았다.

갈지현에서는 적의 식량과 병기를 약취하여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였다. 왜적이 영천에 침공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최문병은 영천의 의병장 권응수와 합세하여 군위 하양 등지의 적을 격파하고 군사를 3부로 나누어 영천성에 다다르니 우장 정대임과 더불어 좌장으로서 말을 달리어 방어하는 적 10여명의 목을 베었다. 따르는 장병이 비로소 용기를 얻어 질풍같이 진군하니 적이 일제히 달아났다. 이에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을 모조리 태워 죽였다.

병사 박진의 전공 상소에 의하여 감목관을 제수받았다. 1599년(선조 32년) 43세로 돌아가니 조정에서 가선대부 한성우윤을 증직하였고, 향인은 자인 원당동 뒷산에 충현사를 세워 우국충의 정기를 길러 향사하여 왔다. 1868년(고종 5년) 폐사하였던 바 그 후손과 지방민이 뜻을 모아 충현사를 복원키로 하고 1979년 정부에서 2,000여만원의 지원으로 사당, 사주문, 담장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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