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인천군(仁川君) 채수는 중종때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이다.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齎),시호는 양정(養靖)이며 보(保)의 아들이다. 1468년(세조14년)에 생원에 합격하고 이듬해 갑과(甲科) 회시(會試)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렇게 세 번이나 모두 장원한 이는 당시 건국 이래 두사람 뿐이었다.
홍문과 응교(應校)로 재직할 때 도승지 임 사흥의 간악한 죄상을 임금에게 낱낱이 아뢰어 그를 외부로 몰아내기도 했다. 권세를 휘두르는 간신을 규탄하는 강직한 충성에 조야(朝野)가 모두 감탄하고 통열하게 여겼다. 이로인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대사헌에 특진하여 뒤에 폐비 윤씨를 옹호하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성종16년 지경연사가 되었고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강직한 성품과 일관된 충성으로 연산군의 학정을 자주직간(直諫)하니 연산군의 미움을 받았다. 다시 예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고 1504년(연산군 10년)갑자사화에 관련되어 단성현(丹城縣)에 귀양갔었다. 1506년 중종 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인천군(仁川君)에 책봉되었다. 59세 때 이조참판을 사임하고 향리인 상주 이안면 중촌리(中忖里)에 낙향하여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독서와 글을 짓고 그리고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그는 만년에 거문고와 바둑, 시와술을 즐기며 한가한 생활을 했고, 1511년에 지은 패관소설「설공찬전......薛公瓚傳」은 그 내용이 윤회화복(輪回禍福)으로 민심을 소란시킨다는 탄핵을 받아 불태워 버렸다. 그는 산경(山經), 지지(地誌), 시문(時文)에 능했다. 유림에서는 그를 함창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봉향하여 충절과 행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