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고려말 충신 달산군 장보지와 진주판관 일신의 후예인 장문서는 1507년(중종 2년)에 안계면 용기동서 났다. 자는 응휴(應休), 호는 문암(文巖), 본관은 순천. 8세 때 그는 효경을 외웠고 13세 때는 소학, 논어, 주문 등을 통달하여 신동으로 알려졌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편부 슬하에서 효성을 극진히 하여왔고 그 인품과 학덕이 뛰어나 서애 유성룡이 국사를 함께 논하자고 벼슬길에 나오길 바랐지만 아버지의 득환으로 사양, 오직 그 간호에만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하루는 의원이 부병에 잉어 고기가 좋다하여 계절적으로 구하기 힘든 잉어를 지금 교촌동 선돌 위수 강변 관어대 굴바위 밑에서 빌어 갑자기 얼음장이 갈라져 얻은 것으로 병환을 낫게 하였고, 또 한변은 역시 엄동설한에 아버지가 수박을 원해 지성을 드려 얻은 것으로 원을 풀어 드렸다 한다.
상을 당해 여름에도 상옷을 안 벗고 겨울엔 곡묘를 폐하지 않았으며 61세(1567년)국상(명종 승하)땐 통곡, 3년간 삭망시 분향 4배 했고, 벼슬은 보안도 찰방이 제수되었다. 이런 놀라운 효행사실이 임금한테까지 알려지자 "남들은 부모의 명예나 친지 청탁으로 벼슬을 하려는데 아버지 병 간호를 위해 자기 앞일 안 돌본 장공이야말로 만인이 본받을 일"이라며 왕이 직접 효자각을 내린 게 영남 지방선 처음 있는 일이었단다. 1577년(선조 10년) 정월 23일에 타계하니 향년이 71이다. 1781년(정조 5년)에 사림선 그를 비안 백천서원에 숭봉 현재 교촌동 한길 가에 효자각이 서 있는데 그 전각 양벽엔 솟아 오르는 잉어와 수박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