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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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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직부자

백온/동엄
활동시기
근대이후
본관
출생시기
1844년
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1844년 영천군 자양면 충효동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엄(東 )이라 하였다. 원래 선생이 태어난 곳은 검단리(檢丹里)라고 불렀는데 선생과 그 아들 용기(鏞基)장군이 의병장으로 순국하자 사림들이 충효동(忠孝洞)으로 고쳐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

고종의 밀지를 보이며 은거할 계책을 말하니 장군은 분연히 입을 열어, "임금께서 신하에게 내린 명령과 어버이가 자식에게 분부하는 것이 같사오니 나라를 구한 후에 사가를 보존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한 줄 압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젊은 자식이 할 일이오니 바라옵건데 소자에게 대임을 맡겨 주시오면 소자힘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여 집을 보존하겠습니다."하고 연 3일동안 한결같이 간청하기에 선생은 자식이 벌써 나라를 위하여 대의를 행하고자 하는데 사가의 걱정으로 만류할 수가 없어 허락하였다.

영남에 내려온 장군은 믿을만한 사람을 뽑아 각 지방에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집결장소를 강원도 오대산으로 정하여 노정기를 배정해주고 진호를 산남의진이라 정하였다. 아들이 대구 옥사에서 풀리자 동엄선생은 잠시 고향에 내려와 부자가 금단동 옛집에서 내년 5월에 강릉에서 만나 서울 진격을 약속하고 구월 초 서울로 돌아왔다.

1907년 아들과 언약한 5월도 지났지만 운명의 수레는 선생의 뜻대로 굴러가지 못했다. 울적한 심사를 안고 8월에 다시 고향에 내려왔다. 그 때 장군께서는 각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던 중 마침 선생이 내려오던 그 날은 고향 자양에서 싸움이 벌어지던 날이었다. 왜적을 무찌른 장군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강릉집결이 지연되었음을 눈물로써 사죄하고, 그 동안의 경위를 이야기했다. 선생께서는 아들을 달래고 한자리에 앉은 동지들을 격려하며 다시 뒷일을 기약했다.

그 날이 1907년 8월 24일 부자가 만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닷새 후 장군의 전사를 전해 들은 선생께서는 "네가 나보다 먼저 죽었으니, 장차 누구와 같이 이 일을 할 것이냐."하시며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손수 [산남의진]의 깃발을 잡았다. 10월 12일 다시 흥해를 치고, 11월 3일 영덕을 공략했다. 가는 곳마다 일본헌병을 잡거나 내쫓고, 분파소를 불태워 백성들을 위로 격려했으며, 부하들의 나쁜 짓을 엄하게 막았다. 그러나 그들은 탄약이 떨어졌다. 얼마 못가서 일본의 대병력이 청하와 청송 거북의 삼면으로 우리의 의진을 포위하고 진격해 오니 선생은 부득이 병력을 이끌고 잠시 동대산으로 들어갔다. 며칠후 걱정을 살필 겸 하산하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12월 3일 청하에서 왜놈에게 사로잡혔다. 왜적은 백발이 성성한 선생을 말에 태워 여러곳을 다니며, "의병대장을 잡았으니, 이제 남은 의병도 항복해라."
고 선전하고 한편 선생을 달래어 항복을 권했지만 선생의 신념은 굽힐 리가 없었다.

의병대장 정환직은 영천에서 대구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영천으로 환송되어, 12월 11일 영천읍 조양각앞 천변에서 왜놈 헌병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 때 난데없는 광풍이 불어 조양각 기왓장이 날라 집행수의 머리를 쳐 즉사케 하였으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일 뜻있는 사람들은 선생과 장군의 충절을 기려 조양각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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