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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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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춘

태화/인백당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순천
출생시기
1525년(중종 20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순천(順天)이요, 자는 태화(泰和)이며 호는 인백당(忍百堂)으로 1525년(중종 20년)에 현감 우(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이 10살이 지나면서부터 문예가 뛰어나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효행 또한 뛰어나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고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여묘하는 효행을 보였다.

21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조정(朝廷)에 일이 있어 급제한 사실을 취소함으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경학(經學)에 마음을 두고 춘추(春秋)와 주역(周易)을 즐겨 많이 읽었다. 또한 이퇴계(李退溪)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김부필(金富弼)과 김부의(金富儀)와는 내외종(內外從)으로 자주 모여서 학술을 토론· 강의하여 많은 지식을 닦고 교환하였다.

일찍이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세자익위(世子翊衛)로 3번이나 천거한 바도 있었으나 그는 가지 않고 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백패가 이미 서울에서 멀어져 白牌己收紫陶遠
소양마을에 몸소 밭 가네. 瀟陽洞衰自 耕
흙덩이 두드리며 좋게 늙으니 擊壤聖化身全老
뉘가 다시 농부 이름 다툴고" 誰復爭吾田父名
라고 하였다. 1586년 61세로 세상을 떠나니 사림(士林)이 소양서원(瀟陽書院) (현재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에 입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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