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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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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성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호는 대은(大隱)이니 고려 태사공의 후손인 권석업(權 錫業) 선생의 셋째 아들로서 1881년(高宗 18年 辛巳) 영양읍(英陽邑) 서부동(西部洞)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준수(俊秀)하고 성품이 활달하였으며 성실 근면하였다. 가난한 가정에서 출세할 길이 없음을 낙심 아니하고 오로지 생계를 개척할 직업에 전심전력함에 농공상업(農工商業)에 종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상업이 번창하여 한때는 일용잡화 포목상(日用雜貨 布木商)으로 영양(英陽)상권을 독점하다시피 한 때도 있었다. 상업을 하는데 인도주의에 어긋남이 없이 친절과 신용(信用) 본위(本位)로 상도의(商道義)를 지켰으므로 상업이 날로 번영하고 재산이 해마다 부유(富裕)해져 갔다.

이로부터 자선사업을 시작하여 흉년에 각 면(面)에 있는 많은 굶주린 사람들을 여러 번 구제하였으며 의성군(義城郡)에 까지 빈민 구제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우리 고장의 학교뿐 아니라 대구여고 대구의학전문학교, 김천고보 등의 설립 기부금을 보낸 폭넓은 자선 육영(育英)사회사업에 의연(義捐) 희사(喜捨)한 덕행에 감사한 민중들이 군내 각 면에 「권영성자선기념비」(權永成慈善記念碑)를 세워 선생의 은덕을 기리었다. 또한 한문 서적 수집 취미가 있어 많은 서책을 사서 모았던 것을 말년에 영양고등학교에 기증하였던 바 후에 영양군립도서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선조(先祖)를 추모하는 사업에도 성의가 극진하여 영모재(永慕齋), 인산재(仁山齋), 사정(思亭)등 제사와 정자를 세웠다. 흔히 자수치부(自手致富)한 사람은 인색하기 쉽다하는데 그는 올바르게 치부하여 현명하게 선덕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안팎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1959년 영양읍(英陽邑) 현동(縣洞) 산성(山城) 사정(思亭)에서 별세하니 향년 79세이다. 영양(英陽) 사회장(社會葬)으로 영결(永訣)하였으며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을 한 건수의 조목을 영양군지(英陽郡誌)에 기재되어 있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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