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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유기장

  • 지정 : 무형유산
  • 한자명 : 奉化 鍮器匠
  • 유형분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 금속공예 > 금속공예
  • 시대 : 조선
  • 지정일 : 1994-09-29
  • 소재지 :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286
놋갓장이 즉, 유기장은 놋쇠를 다루어 각종 기물(器物)을 만드는 장인이다. 놋쇠는 기록에 유석(鍮石), 황동(黃銅), 진유(眞鍮), 두석(豆錫), 주석(朱錫), 청동(靑銅)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만큼 놋쇠는 구리합금의 대표적인 금속으로, 주된 합금재료인 석(Sn)과 아연(Zn)을 넣는 비율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성질의 놋쇠를 만들게 된다. 그 하나는 징, 꽹과리, 대야, 양푼, 식기, 수저 등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와, 다른 하나는 촛대, 향로, 화로처럼 아연합금(亞鉛合金)의 주물(鑄物)유기(鍮器)이다. 또한 주물의 경우에도 단순히 구리에다 아연만 넣는데 그치지 않고 석(錫)을 함께 첨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동전이나 동종(銅鐘)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놋쇠에 대한 기호가 예로부터 유별난 편이다. 그래서 옛 유물 가운데 순동제품이 매우 희귀한데 반하여 통일신라 이래 뛰어난 청동기 미술품을 남겼다. 특히, 고려시대부터 방짜제품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아연이 들어가지 않은 방짜식기의 장점과 금속(金屬) 타악기(打樂器)의 보급과도 유관(有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방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질이 좋은 놋쇠로 일컬어져 왔으며 식기에 있어 여름에는 자기, 겨울에는 놋그릇을 쓰는 것이 습속(習俗)이 되었다. 조선초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유장이 경공장(京工匠)에 13인, 외공장(外工匠)에 전국적으로 35인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곧 경공장에 17인, 외공장에 36인으로 늘어났다. 이 유장이 방짜기술자에 한한 지칭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밖에도 놋쇠를 다루던 장인으로 경공장에 쟁장, 두석장, 종장 등이 있었다. 근래에 놋그릇이 대중화됨에 따라 일이 번거롭고 값비싼 방짜보다는 아연합금의 주물이 보기에 황색과 유사하고 저렴함을 이유로 생산이 증가하고 따라서 방짜의 쇠퇴를 가져왔다. 한국전쟁 후까지 유기의 명맥이 이어진 고장은 김천, 봉화, 안성, 이리, 남원, 장흥, 순천, 함양, 동래 등이었으나 양은과 플라스틱 그릇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그들 지역조차 거의 공장이 문을 닫고 기술자들은 흩어져 버렸다. 현재 기능보유자는 안성의 주물 유기장 및 순천과 납청의 방짜유기장으로 양분된다. 조선 말기 유기공업의 원료인 동과 석은 주로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하였다. 그러다가 수요가 증가하자 1860년대에 들어 갑산(甲山) 동광(銅鑛)을 개발하여 전국적인 수요에 충당하였다. 동시에 보조 연료인 숯은 유점촌(鍮店村)을 중심으로 산촌주민들이 생산하여 공급하였다. 봉화군 삼계리의 유기공업은 184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자연조건은 유기공업을 일찍부터 발흥시키기에 알맞았던 것 같다. 전면적의 84%가 산지와 임야이어서 쇠(동석)를 용해하는데 필요한 숯(목탄) 생산이 용이하고, 수자원 또한 풍부하기 때문이다. 삼계리의 유기공업이 내성천변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수질을 감안한 천혜적 입지조건이라 할 것이다. 처음 삼계리 놋점의 개척자는 유기기술자인 곽춘희(郭春熙) 자 영철(永喆)이다. 그는 경기도 안성에서 같은 기술자인 맹모(孟某)를 대동하고, 삼계리 구점(자연마을 속명, 삼계서원 건너 미비지골 입구)에 솔권(率眷) 정착하였으나 지역이 너무 협소하여 지금의 놋점으로 옮겨 유기공업을 시작하였다. 그런 후에 온 마을이 점차 유기공업에 관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세기말 이래 방짜유기 제조업을 가업으로 전수시킨 자는 점주인 곽주범(郭周範)이다. 이분은 놋점을 운영해 온 유장이나, 상세한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다음으로 김수암(金壽岩)과 김인식(金仁植)이 점주로서 각각 놋점을 운영하였다. 이들은 원래 이 고장 태생으로서 조부 때부터 농업에 종사해 온 양인이었다. 김수암과 김인식은 곽주범이 운영한 구점에서 미숙련공인 풀무꾼으로 출발하여 장기간의 경험과 수련을 겪어 점진적으로 고도의 수공기술을 갖추어 점주의 자격을 인정받아 독립하여 자영하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양인 유장들은 곽주범으로부터 수공기법과 기술을 전수받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은 고도의 기술을 소유한 유장으로서 놋점운영에 주요 역할과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렇게 1840년경에 시작하였던 봉화 삼계리 유기공업은 그 후 정치적, 경제적 시대의 변화에 이기지 못하여 현재 고해룡(高海龍) 일가와 김선익(金善益) 일가 두 집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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