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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돈간재 및 주사

  • 지정 : 기념물
  • 한자명 : 英陽 敦艮齋 및 廚舍
  • 유형분류 :유적_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 시대 : 조선
  • 지정일 : 2003-04-17
  • 소재지 :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663
돈간재는 선조(宣祖) 초에 진사 청계(靑溪) 김진(金璡)선생이 일시 우거하여 살던 삼간의 집이다. 선생은 고향인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를 떠나서 산중인 청기(靑杞)에 와서 사는 동안 영양(英陽)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공로가 많았다. 선생이 입향할 당시 영양은 민도가 낮은 농향(農鄕)으로 민풍이 소박하고 문물이 미개한 벽촌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경학과 문장이 뛰어나 본군의 문풍이 부진함을 개탄하고 1577년(宣祖16) 9월에 향인과 더불어 영산서당 건립을 주창하여창건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타향임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많은 곡물 15곡(斛, 1곡은 현재 10斗임)과 피목 15필을 서당 건립기금으로 기증하여 본군 문풍에 공헌함이 컸었다. 선생의 다섯 아들이 모두 당세에 저명하여, 넷째아들 학봉 김성일 선생은 퇴계선생의 수제자로서, 경상관찰사를 역임하고 일본부사로 따라가서 일본인에게 굴복하지 않고 돌아왔다. 그 후 영산서당이 1683년(肅宗9)에 서원으로 승격한 후 학봉선생은 영산서원에 배향하게 되었으며 다섯 아들이 모두 청계선생에게 계절 마다 문후 차 내왕이 잦으니 이때 사람들 사이에 ‘초동(청기동)은 승지(勝地;좋은터)’라는 말이 있었다. 선생이 연로하여 안동으로 환고함에 선생의 증손인 표은(瓢隱) 김시온(金時溫) 선생이 다시 돈간재에세 우거하게 되었다. 표은 선생은 또한 절의와 문장으로 유명하며 대명절의로 일세에 명망이 컸었다. 표은선생이 와서 돈간재라 현판을 하고 일세 명사들과 시주(詩酒)로 사귀었으며 그 뒤 자손들이 수차 중수하였다. 돈간재에는 학봉선생의 근차백시운(謹次伯氏韻)이 있으며 뒤에는 제실이 있다. 청계선생은 이곳에 와서 오랜 세월을 뜻있게 보내면서 옛 지명을 따서 청계선생의 호를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의 자손은 안동군(安東君) 임하(臨河), 서후면(西後面)에 수백호가 문호를 차리고살고 있으며 우리 고장에도 청기(靑杞) 방전(方田)등 각처에 세거하고 있다. - 영양군(보수보고서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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