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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신리 영천이씨정려비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한자명 : 金泉 信里 永川李氏旌閭碑
  • 유형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지석
  • 시대 : 조선
  • 지정일 : 2000-09-04
  • 소재지 : 김천시 봉산면 신리 525
이 旌閭碑의 主人公인 永川李氏 婦人은 1570年(宣祖 3年 庚午)에 慶尙北道 永川 ○面 ○里에서 察訪 李大有의 딸로 태어나서 이곳 金泉(當時 金山) 봉계마을(現 信里)의 鄭維翰 公에게 시집을 왔다. 李氏婦人은 시집와서 士班의 아낙네로서 일찍이 갈고 닦은 婦德을 잘 實踐하여 男便섬김과 媤父母 奉養에 精誠을 다하였고 그래서 鄕村社會에서 稱頌이 藉藉했으며 同氣間에도 友愛가 두터웠으며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과 過客에게 飮食과 衣服을 厚하게 나누어 救恤의 恩惠를 베풀어 온 마을 婦人들의 師表가 되었고 1592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夫君 通德郞 鄭維翰이 宣傳官을 除授받고 고을을 巡廻하면서 義兵을 募集하여 큰 功을 세웠고 1597年에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夫君은 壬辰倭亂때와 마찬가지로 宣傳官으로서 義兵을 募集 官軍과 合勢하여 倭敵을 討伐키 爲해 出征하였으므로 李氏婦人은 男便을 代身하여 媤父母를 모시며 家事를 도맡고 있었다. 그해 9月 18日에 倭敵이 이곳 봉계마을(現 信里)에 쳐들어와 侵略과 掠奪을 恣行함으로서 李氏婦人은 이웃사람들과 함께 뒷山으로 避難을 가다가 只今 碑閣이 있는 곳에서 被拉되었다. 倭兵이 강제로 李氏婦人의 손목을 잡고 희롱하며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가자 이에 憤然히 抗拒하다가 몸을 더럽힐까 두려움과 恐怖에 사로잡혔다. 이에 더 이상 버티거나 脫出할 可能性이 없자 품속에 있던 銀匠刀로 가슴을 찔러 自決하였다. 倭敵이 野慾을 채우지 못한 憤풀이로 활로 쏘고 劍으로 亂刺하여 四肢를 찢었다고 傳해온다. 28歲의 젊은 나이에 倭敵의 凌辱으로부터 志操와 節槪를 지키기 爲하여 殉節 自決하였다. 永川李氏婦人이 自決한 뒤 36年만인 1633年(仁祖 11年 癸酉)에 朝廷에서 節婦 稱號를 내리고 碑閣을 세우도록 命旌하였다. 그리하여 自決 殉節한 그 자리에 碑를 세워 世人의 龜鑑이 되도록 하였으며, 그리고 鄕里에서는 旌閭碑앞에 우물을 파서 아낙네들에게 李氏婦人의 純潔한 精神을 본받도록 하였으며 그 우물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住民들은 이 샘을 “빗지거리 샘”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그렇게 통하고 있다. 이것은 필시 <비(碑)+집(閣)+거리(道)+샘>이라는 말이 오랜 歲月을 거치면서 이렇게 訛傳된 것으로 보인다. 現在, 住民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地表로 드러난 井口 石段이 3段이었으나 現在는 2段으로 남아있다. 이곳에 우물을 造成했다는 것은 마을의 아낙네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는 點에서 旌閭碑의 象徵的 敎訓을 더욱 强力히 擴散되도록 하는 機能을 한 셈이다. 1892年(高宗 29年) 12月에 이르러서는 朝廷에서 通德郞 鄭維翰에게 通政大夫吏曹參議로 贈職하고 夫人 永川李氏에게는 淑夫人에 追贈하였다.

학술자료

  • 1. 금석문 탁본조사보고서 경상북도 Ⅱ(2015년 발행)
    조사보고서 / 저자 : 문화재청,불교중앙박물관 / 발행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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