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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담 정려비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한자명 : 鄭湛 旌閭碑
  • 유형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지석
  • 시대 : 조선
  • 지정일 : 1999-12-30
  • 소재지 :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255-1
鄭湛은 明宗 3年(1548) 平海郡 箕城面 沙洞里(現 蔚珍郡 箕城面 沙洞里)에서 태어났다. 字는 彦潔, 本貫은 野城이다. 5歲에 母를 여의고, 10歲때에 父와 死別하여 妹夫 黃應澄 膝下에서 修學하며 자랐다. 일찍이 武官에 뜻을 두었는데 24歲때에 嶺南東道兵馬使 洪致武의 편將이 되고, 그 後 北兵使 申砬의 幕下에서 勤務하던 1583年 胡賊 尼湯介를 掃蕩할 때 突擊將으로 큰 功을 세웠다. 宣祖 16年(1583), 35歲때에 武科에 及第하여 亦是 申砬의 亞將, 또 巡撫使 金수의 편將, 龍양衛部將을 거쳐 會寧判官, 慶源判官, 五衛都摠府都使를 歷任하였다. 宣祖 23年(1590) 淸州牧使로 任命되었다가 25年(1592) 4月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西南方 防禦의 重責을 띄고, 金堤郡守로 赴任하였다. 곧 軍士를 整備하여, 助防將 李봉과 함께 熊峙에 나아가 山길을 끊어 設柵하고, 小早川隆景의 15,000名의 敵軍과 對峙하였다. 7月7日부터 벌어진 激戰끝에 敵의 主力部隊를 擊滅하고 마침내 화살이 떨어지자 肉彈戰으로 싸워 敵의 銳鋒은 꺾었으나, 이튿날 正午傾 肉彈戰中 45歲를 一期로 殉國하였다.

학술자료

  • 1. 금석문 탁본조사보고서 경상북도 Ⅱ(2015년 발행)
    조사보고서 / 저자 : 문화재청,불교중앙박물관 / 발행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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