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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삼강정려

  • 지정 : 문화유산자료
  • 한자명 : 善山 三綱旌閭
  • 유형분류 :유적_건조물 > 인물_사건 > 인물기념 > 생활유적
  • 시대 : 조선
  • 지정일 : 1997-09-29
  • 소재지 :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915-3
이 二碑一扁額은 正祖 19年(1795) 善山府使 李采가 殿閣을 짓고 한마을 出身인 忠臣 吉再, 孝子 裵淑綺, 烈女 藥哥의 旌閭를 한 자리에 모아 三綱旌閭閣이라 했다하며 金志遠이 지은 肉筆本 一善續誌(1890~1906)에도 「鳳溪村三綱閭」라고 있으며, 吉再(1353~1419)는 三隱의 한 사람으로서 號는 冶隱, 本貫은 海平이다. 高牙面 鳳溪에서 태어났다. 1370年 開京에서 李穡, 鄭夢周, 權近 等으로부터 性理學을 배우고 1374年 生員試, 1386年에 文科에 及第 淸州牧使에 任命되었으나, 赴任하지 않았다. 1378年 成均館 學正, 이듬해에 成均館 博士, 1389年 門下注書가 되었으며 朝鮮建國後 1400年에 太常博士가 되었으나 ‘두 王朝를 섬길 수 없다’하여 落鄕 後進養成에 注力한 忠臣이다. 孝子인 裵淑綺는 認齋 崔睍(1563~1640)이 지은 一善誌에 依하면 字는 練而이고 鳳溪에 살았으며 고기를 잡아 生計를 이으며 讀書를 했다한다. 庚子年(1470)에 司馬試를 거쳐 文科에 及第하였으나 일찍 죽었다고 한다. 星州人으로 父母를 極盡히 모셔 孝子 旌閭를 받았다. 또한 烈女인 藥哥는 認齋의 一善誌에 依하면 「高麗藥哥」라 題하고 趙乙生의 妻, 乙生이 倭寇에 被拉되어 藥哥는 男便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女는 고기와 채소를 먹지 않고, 잠자리에서는 옷을 벗지 않았다. 父母가 改嫁를 勸하자 죽음으로 듣지 않든 바 8년이 지나 어느 날 乙生이 문득 生還하여 夫婦가 前과 같이 잘 살았다한다. 世傳에 藥哥는 冶隱 吉 先生과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어릴 때에 先生이 讀書하고 있는 것을 보고 “冊속에 무엇이 씌어 있습니까”라고 물은 즉 先生이 가르치되 “忠臣은 不事二君이요 烈女는 不更二夫”라 하였다. 藥哥는 이를 暗誦하여 잊지 않고, 자라서 그 男便이 軍卒로서 邊方에 수자리 가서 倭寇에게 잡혀 갔을 때 藥哥는 등불을 밝혀 밤을 지내기를 8年동안 고치지 아니하였다. 그 男便이 밤에 돌아오면서 고개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집에 등불이 켜져 있는지라 문앞에 이르러서 소리 내어 불렀다. 그러자 藥哥는 門을 열 수 없다고 했다. 男便은 自初至終을 자세히 말했으나 藥哥는 그렇지만 야밤중에 女子 혼자 있어 門을 열 수 없으니 이웃집에 가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 서로 볼 수 있으리라했다. 蔣天敍 詩도 있고 점畢齋의 詩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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