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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교당 유물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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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교당 유물

  • 지정 : 민속문화유산
  • 한자명 : 尙州 東學敎堂 遺物
  • 유형분류 :유물 > 기타 종교공예 > >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지정일 : 1995-03-31
  • 소재지 :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730
尙州 東學敎堂에 수장되어 있는 遺物들은 朝鮮末期에 대두된 東學과 관련이 있다. 東學이 發生된 時代的 背景은 朝鮮末 사회가 부패되고 民生은 도탄에 빠져 不安하고 동요하게 되었으나, 旣成의 宗敎로는 民生을 救濟할 價値觀이 없었다. 한편 天主敎가 傳來되어 庶民層의 非常한 關心을 끌었고, 列强이 浸透하여 民族的 危機感이 팽배된 時期였다. 이때 西學에 對抗하여 固有信仰에 바탕을 둔 새로운 宗敎로 東學이 대두되었다. 尙州 東學敎는 敎祖 水雲 崔濟愚가 慶州의 龍潭에서 깨우치고, 1860年 輔國安民, 布德天下, 廣濟蒼生이란 기치로 東學을 創始한데 연원을 두고 있다. 神通力이 있는 天道로 後天開闢을 豫言하면서 桎梏에 허덕이는 民生을 구제하려고 慶州에서 布敎를 始作했지만 成功하지 못하였고 湖南地方으로 옮겨 敎勢擴張에 成功하게 된다. 各 地域에 접주를 두고 敎道를 관장시켰는데 湖南勢가 擴張됨에 따라 東學 內의 세력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1863년 최재우는 최시형을 북접대도주로 삼아 道統을 계승시켜 敎主로 삼았다. 湖南의 東學에서는 자칭 남접이라고 하여 북접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최재우는 각 접소를 巡行하던중 용담정에서 邪道亂政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890年代 2代 敎主 최시형 말기에 東學은 民衆의 宗敎로 발전되었다. 組織强化에 힘써 敎壇의 基礎로 접주를 두고 實行機關으로 全國에 六任所를 設置하여 宗敎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이어 교조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렸다. 1894년 고부접주 전봉준이 東學革命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였으나 淸日의 개입으로 失敗하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敎勢는 弱化되었다. 최시형은 피신도중 체포되어 死刑된다. 1900年代 3代 校主 孫秉熙에 이르러서는 道卽天道 學卽東學을 표방한 天道敎로 발전되면서 교세는 더욱 확장된다. 그러나 남북접의 대립은 더욱 노골화되어 도통전수에 不滿을 품은 元老들이 獨立된 敎堂을 설립하여 進步會(1904), 侍天敎(1906), 上帝敎(1913), 元倧敎(1914), 靑林敎(1920), 大華敎(1922), 敬天敎(1904~1912), 東學敎(1922), 水雲敎(1923), 人天敎(1923), 白白敎(1923), 天命道(1924), 平和敎(1926), 無窮世(1927), 大道敎(1928) 등 30餘個 敎派로 分裂되면서, 敎勢가 弱化된다. 尙州 東學敎堂도 이때 분리된 敎堂의 하나이다. 尙州 金靑林의 敬天敎도 도통전수에 불만을 품은 東學接主들이 독립된 敎堂을 設立할 때 分立된 敎堂이다. 이는 尙州 東學敎堂의 前身이 된다. 敬天敎 敎主 金靑林은 金侍宗, 金時宗, 鄭侍宗 등으로 불려지며 鄭得雨에게 도통을 전수한다. 정득우는 교도들을 軍隊化하여 武力鬪爭 하려고 했고 不滿을 품은 金周熙는 독립하여 1922년 尙州東學敎堂을 열었다. 김주희는 동학란 후 俗離山에 隱居 修道하면서 崔濟愚의 東學을 體天思想으로 體系化하였다. 그는 敬天敎의 정득우와 손을 끊은 후 1910년 尙州郡 銀尺面 于基里에 들어와 金洛世, 任達文 등과 敬天敎가 亡할 때까지 은복포교를 하였다. 1922년 김낙세 父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東學敎堂을 設立하고 南接道主임을 자처하였다. 그는 東學을 철저히 宗敎的 側面에서 파악하여, 時世變遷을 不問하고 政治得失을 간섭하지 않는 단순한 繼天立極을 目的으로 한 宗敎로 만들었다. 이는 廣濟蒼生의 理念으로 徹底하게 즉각적, 革命的 實踐으로 뛰어든 南接의 全奉準과도 차이가 있고 東學亂에 消極的으로 대처한 崔時亨과도 差異가 있다. 尙州 東學敎堂은 東學이 嶺南에서 北進됨에 따라 疎外된 嶺南을 中心으로 敎勢를 잡고 天道敎와 병립하였다. 1922년에는 朝鮮總督府의 公認을 얻었고 1933년까지는 대대적인 刊行事業을 벌렸다. 이때 刊行된 書籍은 작은 敎壇으로서는 相當히 尨大한 量이었다. 敎勢는 尙州, 聞慶, 醴泉, 榮豊, 安東 등 慶北을 中心으로 忠北, 江原道까지 미쳤다. 東學의 傳統的인 排日意識과 敎政分離의 敎理에 따른 日帝에 대한 非妥協 때문에 東學敎堂도 日帝에 대해 無抵抗으로 一貫했음에도 不拘하고 끊임없는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드디어 1936年 公認取消와 集會禁止의 通告를 받게 된다. 1943년 10월에는 직접적인 彈壓을 받아 東學敎籍에 收錄된 核心信徒가 체포되고 書籍, 什器 등이 압수되었다. 압수된 物品은 光復後 다시 回收되었으나 一部는 散佚되었다. 東學敎의 敎勢는 1944年 敎主 金周熙의 죽음과 함께 급격히 쇠퇴된다. 尙州 東學敎堂에 收藏되어 있는 典籍은 朝鮮末期와 日帝 植民統治期間에 상주에서 활동했던 東學敎徒들의 遺物들이다. 典籍은 東學敎의 經典과 가사의 目錄, 東學經典, 동학가사와 其他 書籍들로 主로 筆寫되거나 木板 또는 木活字로 刊行된 것이다. 이들 遺物의 製作時期는 主로 1920~1930年代이다. 服飾은 五色禮服, 받침禮服, 五色冠, 戰服, 鶴창衣, 儒巾으로 區別되어 있다. 所有者 金正善氏에 의하면 五色禮服은 敎主, 副敎主, 誠敎長, 敬敎長, 信徒長이 天祭時(吉祭)에 입으며, 받침服은 五色禮服에 받쳐 입고 五色冠을 쓴다. 그리고 戰服은 두루막 위에 입으며, 主로 未成年者가 天祭時에 입고 鶴창衣는 天祭時에 一般敎人이 입으며 祭祀時에는 祭官이 입는다고 한다. 服飾의 特徵은 옆트림이 없고 직선배래이다. 五色禮服안에 받쳐 입는 옷부리와 끝단에 線을 두른 것은 朝鮮朝의 중단과 유사하다. 服飾들의 봉제방법은 통솔, 가름솔, 읍솔을 주로 使用하였으며 감침질을 하였다. 遺物은 敎旗, 印章, 民具, 印刷用具로 分類한다. 印刷用具는 木活字本을 印刷하는데 使用하는 木活字, 木活字保管函, 小道具, 받침대 등으로 貴重한 遺物이다.

학술자료

  • 1. 尙州의 文化財(1998년 발행)
    단행본 / 저자 :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 / 발행처 :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
  • 2. 尙州文化遺蹟(2004년 발행)
    단행본 / 저자 : 상주향토사연구소 / 발행처 : 문창사
  • 3. 尙州 東學敎堂 遺物 目錄(2005년 발행)
    단행본 / 저자 : 김문기 / 발행처 : 상주시
  • 4. (상주 동학교당) 소장유물도록(2006년 발행)
    조사보고서 / 저자 : 최희진, 이윤선, 김문기, 경상북도 상주시 / 발행처 : 상주시
  • 5. 상주 동학교와 동학가사 책판 및 판본 연구(2006년 발행)
    학술논문 / 저자 : 김용만, 김문기 / 발행처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 6. 尙州 東學敎堂 記錄物의 書誌學的 特徵과 價値(2015년 발행)
    학술논문 / 저자 : 배현숙 / 발행처 : 한국서지학회
  • 7. 尙州 東學敎堂 傳存 印刷用具의 價値(2016년 발행)
    학술논문 / 저자 : 배현숙 / 발행처 : 한국서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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