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이미지로보기

김면장군 유적_1
  • 김면장군 유적_1
이전 다음

김면장군 유적

  • 지정 : 기념물
  • 한자명 : 金沔將軍 遺蹟
  • 유형분류 :유적_건조물 > 인물_사건 > 인물기념 > 생활유적
  • 시대 : 조선
  • 지정일 : 1988-09-23
  • 소재지 :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16외 16필
이 遺蹟은 壬辰倭亂時 義兵將으로 活躍하다가 殉國한 松菴 金沔(1541~1593)將軍의 墓所 및 神道碑, 陶巖祠, 陶巖齋, 道巖書堂을 一括하여 指定한 史蹟地이다. 將軍의 字는 志海, 號는 松菴, 本貫은 高靈이다. 그는 高靈 良田里에서 誕生하여 退溪 李滉 선생의 門下에서 性理學을 연마하고 後學을 養成하였으며, 參奉 및 工曹佐郞에 任命되었으나 辭退했다. 宣祖 25年(1592)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高靈, 居昌 등지에서 義兵을 糾合, 數十次의 戰鬪에서 勝戰하여 陜川郡守가 되고 義兵將으로 推戴되었다. 宣祖 26年(1593) 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어 忠淸, 全羅道의 義兵과 함께 金山, 開寧에 進駐, 善山大戰을 앞두고 殉國하니 朝廷에서 吏曹判書에 贈職하고 사림에서는 道巖祠를 建立하여 그의 높은 忠節을 後世에 길이 傳하고 있다. 松菴 金沔 將軍은 朝鮮 中宗 36年(1541) 高靈郡 開津面 良田里에서 慶源府使 金世文의 長男으로 태어나 南冥 曺植, 退溪 李滉 선생의 門下生으로 性理學을 연마하고 後學을 養成하였으므로 參奉 및 工曹佐郞에 任命되었으나 辭退하였다. 1592年 壬辰倭亂이 일어나 官軍이 敗散하고 國家가 危機에 빠진 것을 본 金沔將軍은 高靈·居昌 등지에서 數千名의 義兵을 糾合하여 開山浦·茂溪·星州·居昌 등지에서 10餘차례의 큰 전투와 30餘차례에 걸쳐 敵을 물리쳤다. 宣祖는 將軍의 功을 높이 評價하여 陜川郡守, 慶尙道義兵都大將, 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除授하였다. 1593年 3月 將軍은 忠淸·全羅의 義兵과 함께 金山·開寧에 進駐, 善山大戰을 앞두고 쌓인 피로로 病을 얻어 ‘오로지 나라있는 줄 알았고,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殉國하였다. 그 후 1666年 地方士林이 고령읍에 追慕祠堂을 建立하였고, 1789年에 現位置로 옮기면서 神道碑를 건립하여 그의 높은 忠節을 後世에 길이 傳하고 있다.

학술자료

  • 1. 大伽倻의 얼(1982년 발행)
    단행본 / 저자 : 경상북도 고령군 문화공보실 / 발행처 : 高靈郡
  • 2.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조사보고서(2004년 발행)
    단행본 / 저자 : 문화역사마을만들기 고령군추진협의회 / 발행처 : 고령문화원
  • 3. 임란 의병장 김면 장군 유적지 조성 기본 계획(2006년 발행)
    학술논문 / 저자 : 박찬용 / 발행처 : 한국전통조경학회
  • 4. 금석문 탁본조사보고서 경상북도 Ⅲ(2016년 발행)
    조사보고서 / 저자 : 문화재청,불교중앙박물관 / 발행처 : 문화재청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담당부서 :
 문화유산과
전화번호 :
 054-880-3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