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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유기장

  • 지정 : 무형유산
  • 한자명 : 奉化 鍮器匠
  • 유형분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 금속공예 > 금속공예
  • 시대 : 조선
  • 지정일 : 1994-09-29
  • 소재지 :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257
놋갓장이 즉, 鍮器匠은 놋쇠를 다루어 각종 器物을 만드는 匠人이다. 놋쇠는 기록에 鍮石, 黃銅, 眞鍮, 豆錫, 朱錫, 靑銅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만큼 놋쇠는 구리합금의 대표적인 금속으로, 주된 합금재료인 錫(Sn)과 亞鉛(Zn)을 넣는 비율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성질의 놋쇠를 만들게 된다. 그 하나는 징, 꽹과리, 대야, 양푼, 식기, 수저 등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와, 다른 하나는 촛대, 향로, 화로처럼 亞鉛합금의 주물유기이다. 또한 주물의 경우에도 단순히 구리에다 亞鉛만 넣는데 그치지 않고 錫을 함께 첨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銅錢이나 銅鐘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놋쇠에 대한 嗜好가 예로부터 유별난 편이다. 그래서 옛 유물 가운데 純銅製品이 매우 희귀한데 반하여 統一新羅 이래 뛰어난 靑銅器 美術品을 남겼다. 특히, 高麗時代부터 방짜製品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亞鉛이 들어가지 않은 방짜食器의 장점과 金屬打樂器의 보급과도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방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질이 좋은 놋쇠로 일컬어져 왔으며 食器에 있어 여름에는 磁器, 겨울에는 놋그릇을 쓰는 것이 習俗이 되었다. 朝鮮初 經國大典에 의하면 鍮匠이 京工匠에 13人, 外工匠에 全國的으로 35人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곧 京工匠에 17人, 外工匠에 36人으로 늘어났다. 이 鍮匠이 방짜기술자에 限한 指稱인지는 分明치 않다. 그밖에도 놋쇠를 다루던 匠人으로 京工匠에 錚匠, 豆錫匠, 鐘匠 등이 있었다. 근래에 놋그릇이 大衆化 됨에 따라 일이 번거롭고 값비싼 방짜보다는 亞鉛合金의 주물이 보기에 황색과 유사하고 저렴함을 이유로 생산이 증가하고 따라서 방짜의 쇠퇴를 가져왔다. 韓國戰爭 후까지 鍮器의 명맥이 이어진 고장은 金泉, 奉化, 안성, 이리, 남원, 장흥, 순천, 함양, 동래 등이었으나 양은과 플라스틱 그릇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그들 지역조차 거의 공장이 문을 닫고 기술자들은 흩어져 버렸다. 현재 기능보유자는 安城의 주물 鍮器匠 및 順天과 納淸의 방짜유기장으로 양분된다. 朝鮮時代 末期 鍮器工業의 원료인 銅과 錫은 주로 中國과 日本에서 수입하였다. 그러다가 수요가 증가하자 1860年代에 들어 甲山 銅鑛을 개발하여 전국적인 수요에 충당하였다. 동시에 보조 연료인 숯은 鍮店村을 중심으로 山村住民들이 生産하여 供給하였다. 奉化郡 三溪里의 鍮器工業은 184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自然條件은 鍮器工業을 일찍부터 發興시키기에 알맞았던 것 같다. 全面的의 84%가 山地와 林野이어서 쇠(銅錫)를 용해하는데 필요한 숯(木炭) 생산이 용이하고, 水資源 또한 풍부하기 때문이다. 三溪里의 鍮器工業이 乃城川邊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水質을 감안한 天惠的 입지조건이라 할 것이다. 처음 三溪里 놋점의 개척자는 鍮器技術者인 郭春熙(字 永喆)이다. 그는 京畿道 安城에서 같은 技術者인 孟某를 帶同하고, 三溪里 구점(자연마을 속명, 삼계서원 건너 미비지골 入口)에 率眷 定着하였으나 地域이 너무 협소하여 지금의 놋점으로 옮겨 鍮器工業을 시작하였다. 그런 후에 온 마을이 점차 鍮器工業에 관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세기말 이래 방짜鍮器 製造業을 家業으로 傳授시킨 자는 店主인 郭周範이다. 이분은 놋점을 運營해 온 鍮匠이나, 상세한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다음으로 金壽岩과 金仁植이 店主로서 각각 놋점을 운영하였다. 이들은 원래 이 고장 胎生으로서 祖父때부터 父代에 이르기까지 農業에 종사해 온 良人이었다. 金壽岩과 金仁植은 郭周範이 운영한 舊店에서 미숙련공인 풀무꾼으로 출발하여 장기간의 경험과 수련을 겪어 점진적으로 高度의 手工技術을 갖추어 店主의 자격을 인정받아 독립하여 自營하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良人 鍮匠들은 郭周範으로부터 手工技法과 技術을 전수받았던 것으로 推定할 수 있다. 이들은 고도의 기술을 소유한 鍮匠으로서 놋점운영에 주요 역할과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렇게 1840년경에 시작하였던 奉化 三溪里 鍮器工業은 그 후 政治的, 經濟的 時代의 變化에 이기지 못하여 현재 高海龍 一家와 金善益 一家 두 집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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