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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영귀루,동.서재>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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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영귀루,동.서재>

  • 지정 : 유형문화유산
  • 한자명 : 紫溪書院<詠歸樓,東.西齋>
  • 유형분류 :유적_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원
  • 시대 : 조선
  • 지정일 : 1975-12-30
  • 소재지 :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
仙巖書院이 第宅形이라면 이 집은 書院形으로 經營한 것이다. 그래서 配置의 中心은 講堂인 輔仁堂에 있다. 輔仁堂은 正面 5칸, 側面 2칸의 高床形 집이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이고 活柱가 있다. 五梁架이며 연등천장에 우물마루이다. 包는 翼工系이나 蓮花刻되어 後期의 장식적인 요소가 다분히 채택된 모습이다. 최근에 施彩하였다고 後孫은 말하나 塗色公에 의하여 자의로 칠해진 것이어서 丹靑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정도의 施工態度는 門中에서 의례 부끄러운 줄 알만큼 이제 시기도 성숙하였다고 본다. 輔仁당, 主軸線에 있는 집이 詠歸樓와 惟直門이라는 出入三門이다. 三門은 솟을로 新式으로 지어 다른 집과는 格이 맞지 않는다. 詠歸樓는 正面3칸, 側面 2칸의 樓이다. 自然石의 礎石上에 圓柱를 세워 樓柱로 삼고 마루놓아 樓를 架設하였는데 五梁架이며 공포는 柱心包系에 翼工이 折衰한 모양이나 末期的이다. 詠歸樓와 輔仁堂 사이에 東西齋가 있다. 三門式이다. 境內에서 제일 주목되는 집이 2棟인데 그 중에서도 東齋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분명히 어디에서 옮겨다 지은 집으로 原形은 아니나 圓柱를 大樑을 파고 치받아 끼우는 이른바 상투걸이 技法을 보이고 있다. 이 技法은 原初 이래로 最近世까지 傳來되어오는 것이나 그 類例가 그리 흔하지는 않다. 淸道地域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로써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東西齋 남쪽 詠歸樓 左右에 石碑가 각 一基씩 서 있다. 동쪽의 것이 濯纓先生 神道碑이고 서쪽의 것이 書院庭碑이다. 纓歸樓의 東南隅 마당 구석에 碑閣이 있다. 濯纓先生의 祖父라고 하는 金克一公의 旌閭碑와 節孝金先生 旌閭碑라 쓴 것이 각각 龜趺上에 兩立되어 잇다. 輔仁堂의 동쪽 土 外에 尊德祠가 있고 典祠廳과 神道門이 따로 건립되었다. 모두 후대의 집들이다. 輔仁堂의 서쪽에 廚舍라 불리우는 집이 있다. 境內에서 제일 나이 먹은 집인 듯이 보인다. 門中의 [紫溪志]에 의하면 弘治元年(서기 1488년)에 雲溪精舍가 이루어진 이래로 同十三年에 紫溪祠 創建, 同三十六年에 紫溪書院이 重建되고 肅宗二十五年(서기 1699년)에 纓歸樓가 重建되었다. 高宗 辛未(서기 1871년)에 毁撤되었다가 甲子年에 書院을 重建하였다고 하므로 자연히 집의 格調는 末期的이고 堅實치 못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1976년이래 1978년도까지 계속적으로 地方費, 道費 또는 國費와 門中의 自負擔으로 保守를 施行하고 있다. 本 書院은 燕山君4年(서기 1498년) 戊午士禍時 禍를 입은 濯纓 金馹孫先生을 配享한 書院으로 顯宗元年(서기 1660년)에 賜額되었다.

학술자료

  • 1. 금석문 탁본조사보고서 경상북도 Ⅲ(2016년 발행)
    조사보고서 / 저자 : 문화재청,불교중앙박물관 / 발행처 : 문화재청
  • 2. 자계서원의 풍수지리학적 특성과 공간구성에 관한 고찰(2020년 발행)
    학술논문 / 저자 : 양동주 / 발행처 : 택민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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