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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성덕왕릉

  • 지정 : 사적
  • 한자명 : 慶州 聖德王陵
  • 유형분류 :유적_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 시대 : 통일신라
  • 지정일 : 1963-01-21
  • 소재지 : 경주시 조양동 산8외
聖德王은 新羅 第33代 王이다. 聖德王陵은 新羅 初期의 完備된 形式을 갖춘 陵墓이다. 護石의 制度가 크게 發展하였고 陵 四隅에는 石獅子를, 前方에는 石入을 配置하였으며 또 前方 左側에는 陵碑를 세웠다. 以上의 表飾物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護石은 板石으로 세우고 甲石을 덮었는데 板石은 撑柱로 固定시키고 撑柱에는 다시 三角形 石材를 세워 補强하였다. 이 護石 앞에는 圓刻의 十二支像을 세웠고 그 밖으로 數十個의 石柱를 세웠으며 石柱사이에는 上下 2個式의 貫石을 끼워 出入을 못하게 하였다. 封土 正面에는 前後面에 二座式, 左右에 一座式의 眼象이 있는 우수한 石床을 安置하였다.陵 앞에는 文人石 2軀, 武人石 2軀를 左右에 세웠으나 지금은 破損이 심하여 破片만 남았거나 臺石만을 남기고 있다. 石獅子는 陵 後面 左右와 前面에서는 石人밖에 左右로 4軀를 配置하였다. 다시 약간의 거리를 두고 石碑가 있으나 지금은 碑身과 이首를 잃고 龜趺만 남았고 그것도 많은 破損을 입어 龜頭를 잃고 있다. 이들 表飾物의 彫刻手法은 매우 健全하고 雄偉하다. 十二支像은 獸首人身이며 몸에는 甲胄를 입고 武器를 들고 直立하였다. 石人은 破損이 심해 細部를 알 수 없으나 武人石은 甲胄의 表現이 寫實的이다. 石獅子의 表現도 姿勢, 顔面, 體毛 等 매우 整濟되고 着實한 表現이다. 龜趺는 巨大하나 立體感이 缺如된 感이 있고 龜甲文의 彫刻 또한 힘차지 못하다. 머리는 없어졌으나 切斷된 狀態로 보아 直立된 龍形이 아니었던가 推測된다. 이 聖德王陵은 統初에 築造되었을 것으로 十二支를 비롯하여 石人 石獸를 갖추는 우리나라 最初의 例로서 매우 注目되는 陵이라고 하겠다.聖德王은 諱를 興光이라 하고 本名은 隆基이다. 金氏 王으로서 神文王의 第二子이며 李昭王의 동생이다. 文武王이 三國을 統一한 後 神文ㆍ孝昭의 二王을 거치는 동안 國力은 富强해지고 政局은 安定되었으며 唐과의 文化的 紐帶는 더욱 强化되었다. 특히 唐과의 교섭이 빈번하여 거의 每年 唐과의 使臣 往來가 있었고 文物의 交流 또한 왕성하였음은 三國史記에 明白하다. 聖德王陵의 外表飾物의 設置 또한 이러한 唐과의 文化交流의 結果이겠지만 充實한 國力과 鍊磨된 技術의 所産임은 이 王陵의 彫飾을 떠나 同王代에 建立된 甘山寺의 二軀의 石造 佛像을 보아도 立證되는 바 있다. 聖德王은 나라를 다스린지 36年 2月에 昇遐하니 諡號를 聖德이라 하고 移車寺 南쪽에 장례지냈다. 王陵北쪽에는 移車寺로 推定되는 寺址가 있고 倒壞된 石塔이 傳하고 있다.

학술자료

  • 1. 경주 성덕왕릉 12지신상 배치의 원형과 그 의미(2017년 발행)
    학술논문 / 저자 : 崔珉熙 / 발행처 :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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