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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정몽주

자(호)
달가/포은
인물유형
충신
시대배경
고려시대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으로서 고려 충숙왕 복위 6년에 경상북도 영일군 오천읍 문충동에서 출생하였다.(당시 연일현) 후에는 청림동에서 기거하시다가 청년시절에는 그의 외가인 영천에 이거하였다.

구태여 자랑할만한 것이 있다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바 있는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그의 어머니 이(李)씨는 교양이 높고 특히 자녀들의 교육과 장래에 대하여 심혈을 기울인 현모였다고 한다.

포은은 자애스럽고 엄한 어머님의 가정교육에 힘입었으며 본인 또한 머리가 현명하여 벌써 14살 때에 진사에 합격하고 16살 때에는 가르치는 글방 스승까지도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포은 선생이 18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꿈에 30여 년 전의 인물인 주공을 만나 [몽룡은 후세에까지 가문과 명성을 길이 빛나게 할 것이니 소중히 키우시오] 하는 계시가 있어 관례(冠禮)를 치르고 이름의 "용"자를 버리고 "몽주(夢周)"로 또다시 개명하였으니 우리가 충과 효의 상징으로 오늘날 받드는 이가 바로 정몽주 선생이시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20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3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하였으며 묘소 옆에다 움막을 짓고 산중에서 혼자 3년 동안이나 상식(上食)을 올리고 효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효자로서의 이 소문이 공민왕에게도 전하여져 그의 집에는 정표(旌表)를 세워 표창하였다고 전한다.

포은 선생은 24세 때에 과거에 응시하여 초장 중장 종장 3장에서 장원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라는 벼슬에 올라 이때부터 그는 기울어져 가는 고려왕조의 중흥을 꾀하고자 오직 "충"과 "의"로서 전력을 다하였다.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여 뭇 선비들을 탄복케 하였으며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서 추앙을 받았다 한다.

이성계가 요동정벌 문제로 최영과 대립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수창궁을 점령하고 우왕이 강화로 내쫓기자 이성계를 뿌리치고 만다. 정몽주는 만일 이성계가 왕위에까지 앙심을 품었다면 목숨을 걸고 만류하리라 하고 이때부터 각오하였다고 한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표면상으로는 친교를 계속하였지만 속으로는 서로 경계하고 배제할 기회를 기다리다가, 이성계가 사냥도중 낙마하여 벽란도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러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문병을 구실로 그를 방문하였을 때 이방원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정몽주 선생의 심중을 떠보기 위하여 시를 읊었으니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하여 백년까지 살으리'

정몽주 선생은 이 시조가 자기의 마음을 떠보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추상같은 그의 시조에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제거하기로 결심하여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다. 정몽주는 이 암살계획을 변중랑이라는 심복부하로부터 미리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정몽주는 살해되던 날 아침 조상들의 제단 앞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을 불러놓고 [충효를 숭상하는 우리 집의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정몽주 선생은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했다.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아무 말 없이 마부는 말을 선죽교(善竹橋)로 향하였을 때 순간 4∼5명의 괴한이 나타나 쇠뭉치를 휘둘렀다. 이때 마부가 쓰러지고 정몽주 선생이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정몽주 선생의 나이가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선죽교라 불리워졌으며 이후 태종은 그의 충절을 길이 세겨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현재 영일군 오천읍 구정동에 포은 정몽주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오천정씨 문중과 영일향림(鄕林)이 비명(碑銘)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한 곳이 있으며 처음에는 오천서원과 유허비각이 나란히 있었으나 서원은 오천읍 고현동 서원리로 옮기고 현재 이곳에는 유허비각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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