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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우륵

자(호)
 
인물유형
기타
시대배경
삼국시대

가야금의 창시자이며 대가야의 악성 우륵은 고령군청에서 서북쪽으로 5리도 못되는 고령읍 쾌빈동[금곡] 또는 [정정골]에서 대가야의 가실왕의 명을 받아 중국의 쟁을 본따서 12현금을 만들어 연주한즉 [정정]하는 웅장한 소리가 났다고해서 그 가야금의 여운을 따라 이곳 마을 이름을 [정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골짜기를 [내곡동]이라고도 하고 속칭 [낫질]이라고도 부르는데 [낫질]의 어원은 [나실]에서 나온 것으로 [나실]을 [임금이 오신 마을]로 풀이 된다. 신라 때는 임금의 거동을 [어내]라 했으니 이 말과도 통한다. 대가야가 망하고 신라가 성할 무렵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국 정벌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이곳 내곡동까지 온 것이 인연이 되어 [낫질]이라고 오늘날까지 부르고 있다.

우륵이 살았다는 [정정골]에서는 중국의 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악기를 수입해서 연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보면 가야금은 중국악부의 쟁을 본따 그 소리가 쟁쟁하였다고 하였고 [그 위가 둥그니 하늘을 본따고 아래가 평평하니 땅을 본뜬 서이며 또한 현주가 열두개니 이는 1년 열두달을 본뜬 것이다]라고 하였고 [완우]는 [쟁의 길이가 6척이니 율수를 본딴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야금을 제창한 가실왕은 악성 우륵에게 계속 작곡할 것을 명하였고, 우륵은 가야연맹 12지방을 소재로 한 12곡을 작시작곡하였다. 이 12가야곡이 우륵 혼자만의 창작곡인지 아니면 가실왕과의 합작인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어쨋든 순수한 대가야인 독창적 두뇌에서 나왔으니만큼 후대의 신라인은 이 악기를 가야금이라 칭하게 되었다.

우륵이 신라로 가게 된데는 두가지 설이 있으니 하나는 귀화설이고 또 하나는 포로로 잡혀갔다는 설이다. 한국사대계(10권 년표 160편)는 [신라 가야인 우륵은 국원(지금의 충주)에 안치하고 가야금과 가무를 가르치게 함]이라고 기록하였고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에 보면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봄 정월에 연호를 개국으로 고쳤다. 3월에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에 이르러 우륵과 그제자 니문이 음악을 잘 한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은 하림궁에 머물러 그들로 하여금 가야금을 타게 했는데 두사람이 각각 새로운 곡을 지어서 연주했다. 진흥왕 13년(서기 552년)에 왕이 계고 법지 만덕 세사람에게 명하여 음악을 우륵에게 배우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대가야가 신라에 망한 것이 562년(진흥왕 23년)이므로 대가야가 망하기 10년전에 우륵은 신라로 귀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륵이 대가야를 버리고 신라로 귀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상옥 고대 교수는 월간 새마을 1976년 5월호 [내고장 전설 충북 중원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번 악기가 완성되면 궁중의 연회도 많아진다. 즉 풍류를 즐기는 왕일수록 왕자신이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우륵은 왕이 너무나 악(樂)을 좋아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신라의 군사들은 가야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왕이 유흥에만 도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도성안으로 들어와 가야국의 국왕을 사로 잡으며 종묘 사직을 없앴다. 이러한 불행한 일이 오기 조금전에 우륵은 악기 때문에 국각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산속으로 도망쳤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 우륵은 선견지명이 있어 대가야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고 신라로 귀화했다고 볼 수 있다.

우륵은 말년을 탄금대에서 달천을 건너 마주 보이는 곳에 대가야사람들이 모여 우륵의 가야금을 들으며 우륵과 함께 울었다는 청금정이 지금의 충주시 칠금동 390-400번지에 있다.

우륵은 평생 185곡을 만든 것으로 고기에 나타나 있으나 현재까지 남은 것은 단 한곡도 없다. 다만 그가 대가야국 [정정골]에서 12곡을 만든 곡명만이 기록에 남아 있는데, 하가라, 상가라,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 이사, 상기물

이상 12곡이다.

가야금은 신라에 들어가 [신라금]이 되었고, 그후 일본까지 건너가 일본의 주주악기가 되었으며 일본 나라 정창원 보물고에 그때의 가야금이 1,300여년전 모습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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