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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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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난상

계웅/병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507년(중종 2)
시대

상세설명

1507년(중종2)에 습독(習讀) 현(俔)의 아들로 당시 한양의 도제동제(道濟洞弟)에서 태어났다. 1537년(중종32) 31세에 식년무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좌사서(世子侍講院 左司書), 병조좌랑(兵曹佐郞)등을 역임하였고, 중종(中宗)이 승하(昇遐)하시고 인종(仁宗)이 즉위(卽位)하시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이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 인종(仁宗)이 일찍이 승하(昇遐)하시고 명종(明宗) 즉위하였고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정치적 반목(反目)으로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連累)되어 당시의 영천군(榮川郡) 병산( 山), 지금의 영풍군 단산면 병산리로 퇴거(退去)하여 시서(詩書)와 산천(山川)을 벗하며 은거(隱居)했다.

그후 1547년(명종2)에 양재역 벽서사건(壁書事件)이 일어나 무고하게 남해(南海)에 적거(謫居)하여 20년이나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였다. 이때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도 진도(珍島)로 유배(流配)되었으니 을사명현(乙巳名賢)들의 수난이 극심했다. 그리하여 1567년(명종22)에 단양(丹陽)으로 이적(移籍)하였고 명종이 승하(昇遐)하시고 선조(宣祖)가 즉위(卽位)하자 모든 직첩(職牒)이 환급(還給)되어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 성균관 대제학(成均? 大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등을 역임(歷任)한 후 1572년(선조5)에 64세로 세상을 마쳤다.

1828년(순조28)에 가선대부 이조참판(加善大夫 吏曹參判)우로 추증(追贈)되고, 1834년(순조34)에 지금의 영주시 가흥1동 한절마을에 있었던 오산서원(梧山書院)에 배향하였으며 문집으로 병산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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