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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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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대

사겸/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화순(和順)
출생시기
1719년(숙종 45)
출생지
조마면 신안리
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화순(和順) 최씨 수우당(守愚堂) 영경(永慶)의 후예로 1719(숙종 45)년 조마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자를 사겸(士謙)이라 했고 어릴 때부터 기축옥사(己丑獄死 : 선생의 선조인 수우당은 그 스승인 남명(南溟) 조식(曺植)으로부터 '세상에 드문 인재로 사랑 받은 대선비였으나 1589(선조 22)년 정여립의 반란사건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함)로 인해 서울의 명문가가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자손은 궁벽지로 흩어지고 생계조차 잃은 것을 통탄하여,
'빛나던 가문은 빛이 없어지고, 당장에 끼니를 잊지 못하시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신다. 붓을 잡아 선비로 나서는 일은 너무도 멀다, 내 장차 무과로 나서리라.'
가문을 보존하고 부모를 봉양할 것을 거듭 마음에 새겨왔다 한다. 1741(영조 17)년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평생에 지을 수 없는 한을 머금기도 했다.

선생은 1754(영조 30)년 감찰(監察)로 출발하여 사천(泗川) 현감으로 나갔다. 현감으로 있을 당시 고향의 어머니를 위해 보낸 양식이 피(잡초의 열매)였다니 선생의 현민을 사랑하고 정사에 얼마나 청백했는지는 짐작이 되며 임기가 만료되자 모든 현민이 일년만이라도 더 있어 주기를 간청했다 한다. 1759년에는 어머니 마저 여의었고 1779(정조 3)년 선전관, 1780(정조 4)년 낙안 군수(樂安 郡守)가 되었다. 이때도 민폐를 없애고 목민관으로서의 본이 되어 군민은 선생을 어버이같이 믿었다 한다. 또한 당시에 가뭄이 극심했을 때,
"이 고통을 당하게 하는 책임이 오로지 내게 있다."
하고 선생이 손수 목욕제계하고 금보단(金普壇)이나 황사(隍社)에 나가 기도하니 문득 비가 내려 군민은 더욱 그 정성에 감읍(感泣)했다 한다. 선생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당신의 은혜를 영영 못 잊을 일입니다!"
하고 낙안군의 늙은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슬퍼했다. 결국 군민은 선생의 화상(畵像)을 그려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장군 영당(影堂)에 함께 모시고 산분을 봄 가을로 제사지내듯 받들어 모셨으니 공이 군민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 수 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 효성을 다하고 가문을 빛냈으며 국민의 목민관으로서 최선을 다한 선생은 1783(정조 7)년 64세를 일기로 영면하니, 묘갈명(墓碣銘)은 양(천陽川) 허전(許傳)의 찬이다. 현재 선생의 영정(影幀)은 조마면 신안동 안영사(安影祠)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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