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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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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준

/경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여준(汝峻)이요 호는 경산(耕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문창후 고운 최치원(文昌侯 孤雲 崔致遠)선생의 11세손으로 여말의 공신(功臣)이며 고려조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여 절의를 지킨 검교정승(檢校政丞)이였던 관가정 최청(觀稼亭 崔淸)의 8세손으로 1567년(선조 22년)에 태어났으며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입청도조(入淸道祖)이기도 하다.

선생이 청도 땅에 들어와 각남면 일곡동에 택리(擇理)하여 정착하게 된 연유는 1592년(선조 25년)에 왜적이 쳐들어와 참상을 이룬 임진왜란이 얼어나자 선생은 대구에서 란을 만났는데 그 때 선생의 나이가 26세 때 였다. 선생은 우선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팔조령(八助嶺)에 올라 화를 면한 후 역시 대구의 선비였던 여모당 손처눌(與慕堂 孫處訥)선생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다. 그후 풍각에서 왜적을 만나 이들을 물리친 후 드디어 청도의 오산기슭에 이르렀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청도읍성을 점령하고 있음을 알고 청도의병(淸道義兵)인 박경전(朴慶傳), 김명원(金鳴遠), 이정욱(李廷郁), 이용운(李龍雲), 이철(李澈) 등 여러 선생들과 합세하여 청도에 들어와 있는 왜적을 모두 쫓아내 안정을 찾은 후 낮실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온 향인들이 선생의 충절과 효도와 덕행을 칭송하였다 한다.

1626년(인조 4년)에 나라에서도 선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을 내렸고 다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 증직이 더 해졌다. 지금도 학남서원(鶴南書院) 안뜰엔 선생의 충효를 표창하는 충효비각(忠孝碑閣)이 있다. 이렇게 경주 최씨(慶州 崔氏)가 청도에 들어와 정착한지도 약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면이 이어나와 곳곳에 거주하고 있으나 이 낮실이 그 중심이 되어 있다.

선생의 6세손인 최학승(崔鶴昇)선생은 자가 성언(聲彦)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우승지(右承旨) 등을 지낸 훌륭한 문신이 였다. 선생의 7세손이고 우승지 최학승(右承旨 崔鶴承)선생의 큰 아들인 군수 최한주(郡守 崔翰周)선생의 자는 정여(禎汝)로 1885년(고종 22년)에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부임하여 동년 12월에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전임하였으며 둘째 아들인 최익주(崔翼周)선생은 진사(進士)에 급제 하였다.

참고문헌 : 청도문헌고, 도주지, 영남루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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